[상상] 우울
우울 속으로 빠져든 사람은 과거만을 단순히 반복해서 생각한다. 거기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끼어들 빈틈이 없다. 내일은 우울이라는 철벽에 막혀 있고, 현재는 내일로 나가지 못한 채 내 안으로 깊이 깊이 파고들어가 그 구덩이에 과거만을 가득 채울 뿐이다. 채워진 과거에는 이야기 없다. 질척이는 감정과 어두운 그림들만이 과거의 전부다.
사람들은 때로 우울적 특이함을 창조적 개성으로만 생각하곤 한다. 우울한 이의 우울한 습관과 특이함의 고통은 외면되고 그런 특이함들은 단지 예술적 가치와 특별함으로 추앙받는다. 우울함에 빠져든 사람은 그런 특이함과 특별함의 가치를 보상으로 받아들이며 우울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운명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우울을 통한 인간 내면과 사회의 현실은 비록 너무 어둡고 부정적이만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예술이 보이는 세계의 장막을 걷어내 그 뒤에 숨겨진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울한 이들은 예술가와 형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울한 사람들의 말과 글과 행동은 낯설고 부담스럽지만 그것은 묘하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스며든다. 그들은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일 직접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마치 예술가와 같다. 그래서 우울은 마치 예술가의 전유물처럼 생각되던 시대도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우울에는 내일이 없다.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깊은 밤은 있지만 미명이 감춰져 있는 칠흑같은 새벽 어둠은 없다. 더하여 태양이 높이 떠오른 한낮의 밝음도 없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사람, 과거라는 어둠 속으로 빠져가는 그 속에서 자기를 찾은 사람 곧 우울을 극복한 사람은 과거를 기억과 추억의 이야기로 재창조하는 이야기꾼이 된다. 그는 과거의 그것을 실처럼 만들어 자신의 미래의 양탄자를 짜내는 그런 창조적인 직조공이다. 겪었던 일들은 이야기로 변해간다. 감정은 다양해지고 가능성도 많아진다. 바뀔 수 없었던 사실은 시와 동화와 신화가 된다. 이방인이요 피해자였던 나는 이야기속의 주인공이요 신화속의 영웅으로 바뀌어 간다. 그에게는 내일이 있다. 비록 지금은 어둔 새벽이지만 그 뒤에는 떠오르는 태양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의 가슴은 가라앉지 않게 편안한 어둠을 갖고 있고 그의 눈은 밝으면서도 시원한 한낮의 밝음을 바라본다.
우울을 빠져나온 사람은 우울의 흔적을 갖고 있다. 모든 상처에 흔적이 남듯이 우울함도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그 우울한 과거조차 내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는 때로 순간 순간 생각과 감정의 틈새로 과거의 흔적들을 느낀다. 깊은 연민과 슬픔 그리고 아픔을 떠올린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그것들은 더이상 그를 휘어잡지 못한다. 오히려 그가 참으로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간미의 한 흔적이요, 어둠을 뚫고 살아왔다는 영광의 상처다. 어둠을 겪어낸 사람만이 간직할 수 있는 삶의 눈과 가슴이다. 타인을 볼 때 그들의 어둠을 보며 품을 수 있는 가슴이요 손길이다. 그의 이야기에는 과거로 부터 시작되었지만 끝나지 않은 내일로 이어진다. 죽음의 골짜기를 걸으며 수렁텅이로 가라앉는 어제였지만 희망의 산을 오르는 영웅의 이야기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야기는 힘이있고 생명력이 있다. 부드러움과 위로가 있다.
확실히 우울함이 주는 내적인 고통과는 달리 그들의 예술가적 감성은 참으로 멋져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우울하고 특별한 예술가보다는 유쾌하고 평범한 아저씨가 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되고 싶다. 사람의 깊은 심연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높은 산에 있는 생명의 감동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고매한 법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더욱, 될 수만 있다면 영웅이 되고 싶다. 깊은 수렁과 어둠을 겪어 나왔지만 저기 있는 산도 끝이 아니라 결국 내일로 향하는 작은 삶의 모퉁이임을 생각하며 더 먼 길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런 영웅이 되고 싶다. 비록 마음과 몸에는 우울의 흔적들이 있겠지만 그것이 실패와 부끄러움이 아니라 내가 인간임을 그리고 이곳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않게 하는 삶의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영웅이 되고 싶다.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의 눈을 본다. 나와 같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보인다. 저기 과거로 빨려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저기에는 그곳을 빠져 나오는 사람도 눈에 보인다. 그리고 아직 과거가 무엇인지 모른 채 밝게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보인다. 그들을 보면서 혹 저들 중에 삶을 버티고 이겨낸 그런 영웅들이 있지 않을까 바라본다. 그런 영웅이 내 어머니요 아버지 혹은 내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줄 모를 일이다. 그래 그런 영웅들이 여기 저기 많아 졌으면 좋겠다. 다만 바라기는 갈 수록 가라앉는 것만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으며 내일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아지길 바랄 뿐이다.
2012.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