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무모한 방문
이번 겨울, 마을 집들을 가가호호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종교적 용어로 전도라고 하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선교를 위한 스킨쉽 SM(Skinship for Mission)이라 부릅니다. 교회 반경 1.5km 내에서 200호이상되는 집을 찾아다니며 교회 홍보를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이란 로고와 함께 교회이름과 전화번호가 인쇄된 코르크재질로 만들어진 꽃게 모양의 냄비받침대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매년마다 내게 조금씩 보내진 선교비를 모아서 여러가지 일을 하곤 했는데 올해는 마을 전체에 보내는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요즘엔 덜하지만 불과 5,6넌 전만 해도 도시에서는 교인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의외로 이 곳 시골에서는 지난 수 십 년 동안 목회자가 집들을 직접 찾아가 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 찾아간다고 하니까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이 듣지 않아요. 그딴 선물을 왜줘여. 그 인간들은 고마워하지도 않는데. "며 역성을 내는 교우도 있었습니다. 추수감사절에는 이웃을 위해 떡을 더 해서 나눠줍시다라고 했더니 "그딴 떡해서 왜 사람을 나눠주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말 다했지 뭡니까.
늘 교회에서 서로 싸우고 나눌 줄 모르고 섬길 줄 모르는 비판의식만 충만한 채로 오래 살아온 분들도 있는지라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인정한다든지 섬기고 희생하는 것을 낯설어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교우들이 함께 하지 못해도 나 혼자라도 돌아보자”라는 생각에 선물을 준비하고 마을을 돌기로 작정했습니다. 교우에게는 함께 참여할 분들은 참여하자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나누고 가가호호 찾아가는 것에 부정적으로 함부로 말하는 분에게는 분명하게 얘기 했습니다. "내가 하기 싫다고 남까지 못하게 하는 건 참 안좋은 습관입니다. 그리고 안되긴 뭐가 안됩니까. 안된다고 하니까 안되는 거죠. 된다고 생각하고 하면 열에 하나는 됩니다. 그런데 안된다고 하고 안하면 될것도 안됩니다. 안하실려면 침묵하고 기도하시던지 아니면 축복하고 격려하던지 둘 중 하나만 하세요.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거 정말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평소에도 늘 부정적인 말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활짝웃으며서도 분명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내 말을 듣고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시면서 “내가 맨날 이렇게 말하면서 벌받으면서도 또 이렇게 말해요”라며 금새 누그러뜨리십니다. 매년 겨울에 발을 다치고 올 해도 손을 다쳐서인지 그걸 하나님이 벌주셔서 그랬다고 생각하신 듯 싶습니다. 사람의 나쁜 습관은 참 고치기가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감정적 고비를 넘기고, 오늘 주일에는 오후에 마을 하나를 돌았습니다. 마을 분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마흔일곱가구가 있었는데 집을 일일이 방문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사는 교우 한명과 함께 동행했는데 교우 얼굴 표정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안해봤던 일이기도 하고 두려움이 앞섰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분 눈에는 제가 굉장히 무모해 보이기도 했을테죠.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은 마흔일곱가구로 구성되어있었는데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목한 시골동네가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어느 시골을 가도 화목한 시골동네는 이미 오래된 옛날얘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을은 세개의 지역으로 분할이 되어있었습니다. 양편과 언덕 위로는 멋진 집들이 들어서있었고 중간에는 오래된 집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집들은 최근 5-10년 사이에 들어온 도시 사람들 집이었고 오래된 집들을 원래 마을 토박이 들이 살던 집이었습니다. 새로 지은 집들에는 담장이 있었고 경보장치와 큰 개들이 있었습니다. 기존 마을과 소통하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가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함께 마을을 도는 교우는 얼굴이 좋지 않았니 싶었습니다.
마을 회관을 찾아가니 할머니들이 열댓분 앉아계셨습니다. 할머니라 함은 70~100세 사이를 말합니다. 들어가서 인사를 하니 모두들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화투놀이에 정신이 없으셔서 내가 찾아가도 크게 반기시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자주 보다보니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새해 선물이라며 건강하시라고 전해드리면서 손을 잡고 한번씩 안아 드렸습니다. 회관에는 아까까지 부정적으로 얘기하던 교우도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니 머쓱해지신 듯 보였습니다. 나는 "거봐요. 해보지도 않고 이렇게 좋아하고 반가워하지 않습니까”라며 속으로 혼잣말로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집을 하나하나 돌면서 토박이 마을 교우에게 물었습니다. "이 집은 뭐합니까?" “안산 시장 나가려고 하신 분 집예요. ".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기에 선물만 우체통에 넣고 나왔습니다. 옆집으로 갑니다. "이 집은요". "거긴 무당집이예요"라고 하면서 앞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합니다. 내가 나서며 문을 두드립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역시 선물을 걸고 나왔습니다. 옆에서 조그만 소리를 냅니다. "무당집인데...". 내가 말합니다. "영험하지 않아요.". 그랬더니 "그쵸? 목사님?..." 얼굴이 조금 펴지며 걷습니다. 무당이니 뭔가 영험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서워했던게 있었던 듯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이 더 좋습니다. 뭔가 종교체험을 한 사람들은 오히려 얘기하기가 수월합니다. 특히 동양종교를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에 동양종교의 수련에 흠뻑 취해서 주문도 외우고 단전호흡하고 산에 오르고 나무와 대화하고 걷기 연습하던 그런 시간들이 있어서인지 이른바 자기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체험과 생각이 그다지 낯설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처음에는 쓸모없어 보였던 경험도 주의 일을 하다보면 나름 쓸모가 생기나 봅니다.
한집 한집 돌지만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집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함께한 교우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멋진 청년도 있었고 아름다운 아가씨도 있었고 중후한 신사도 있었습니다. "옆 마을 교회에서 왔습니다. 새해 선물드리고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니 집에 있는 분들은 모두들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골목을 돌아서니 좁은 골목길에서는 할아버지들 몇몇이 모여서 얘기를 하십니다. 마을 토박이 할아버지들입니다. 원주민이죠. 가서 인사를 합니다. 나는 인사를 할 때면 "어르신", "선생님"이라는 말을 주로 씁니다. 그리고 "어르신 꼭 건강하세요"라는 말도 하면서 꼭 손을 잡습니다. 할아버지들 손은 모두 겨울 흙처럼 거칠고 척박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따스합니다. 손이 차가운 분도 있는데 그런 분들은 몸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손아귀의 힘을 느끼고 몸의 형태를 보고 안색을 살핍니다. 그리고 아픈 부분이 느껴지면 속으로 기도하며 입으로 축복합니다. "어르신 불편한데 빨리 나으셔야죠". 그러면 거의 대부분 맞습니다. 관찰력의 결과입니다.
옆 마을 교회에서 나왔다고 하며 "새해 인사겸 작은 선물 드리러 왔습니다" 자초지정을 고하니 반갑게 맞아 주시며 고마워 하십니다. 멀리서 다가설 때는 낯선 사람이 오는가 싶어서 경계를 하는 모습이 역력한데 인사를 하고 손을 잡으면 몇만에 얼굴의 경계심이 풀어집니다. 그리고 다음에 가야할 집을 안내해주기도 하고 여러가지 정보도 주십니다.
함께 집을 방문하는 교우는 어느새 얼굴이 환하게 펴졌습니다. 본인도 평소에 안가던 집들이었다고 합니다. 마을이 이렇게 생겼었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저분이 저렇게 맞아줄 줄은 몰랐다고 하십니다. 마흔일곱가구가 있다해서 선물을 50개 준비했는데 혹시 몰라서 55개를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집을 다 돌면서 하나씩 드리고 났더니 선물이 1개만 남았습니다. 세대로는 쉰넷 세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마을이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나름 마을을 잘 안다고 생각하던 분들도 마을도 마을 사람들도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은 관습과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라 늘 자신이 판단한게 맞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경험한게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건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다가서면 기존 알고있던 마을 사람들과 마을은 갑자기 변합니다. 이미 사람들은 달라졌는데 본인은 늘 과거만 생각하고 다 안다고 생각했기에 달라진 것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은 다른 것들을 알아채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설령 사람이 바뀌지 않았다 해도, 다른 희망 다른 소망을 품고 다가서면 사람은 바뀝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너무도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과거의 그 마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몸과 마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살았지만 그들 또한 기존의 사람들에게 다가서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들이 갖고 있던 생각으로 사람들을 규정했기에 서로들 높은 담만 쌓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같이 사회성 없는 사람은 오히려 무모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예법으로 서로 문화적으로 맞추기 보다는 내가 가진 희망과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때로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사람들이 잘 안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걸 신앙이 주는 용기라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접근해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인 판단과 더불어 어떻게 접근해야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신앙적 감성이 줄다리기를 하면서 때로 나를 사람들에게 다가서게 만듭니다. 바로 이번 경우처럼 말이죠.
마을 분들은 나를 보면서 "목사님이 바뀌셨나?"라며 서로들 되묻습니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더 젊은 분이 오셨네?"라고 믿지를 않으십니다. 아마도 기존의 소극적으로 인사만 하는 것과는 달리 오늘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섰기에 이미지가 달라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긴 지난 번에는 "결혼은 하셨어요? 친척에 교회다니는 이쁜 아가씨 있는데"라며 말을 거는 아주머니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예요"라며 웃으며 답을 했는데 아주머니가 아주 실망한 눈치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얼굴은 그렇지 않은데 검은 양복에 클러지칼라를 하고 활기차게 움직인 모습을 "젊은 사람답다"라고 느끼신 듯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의 영역으로 다가설 때면 굉장히 주의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만 하다가는 전혀 다가설수가 없게 됩니다. 때로는 특별한 기회를 틈타서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무모함이 좋은 결과를 낼때가 있습니다. 다만 그런 무모함이 무례함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여러가지를 고려하고 겸비하는 자세가 더 필요합니다. 집집마다 방문할 때 욕먹을 각오하고 물바가지 뒤집어 쓸 각오하고 갔는데 그런 일을 없어서 다행이긴 합니다. 아직 일정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릅니다. 하지만 차라리 그런 일이 벌어지길 은근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부담스런 일이긴 하고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대개 끝이 좋게 끝나기 때문입니다. 필요이상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에는 기독교나 교회, 목사에 대한 깊은 억화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다가 드러낸다는 것은 결국 억눌렀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고 문제가 해결될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부드러운 행동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고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안에서의 희망을 발견해 간다면 더욱 좋을 일입니다.
한시간 반을 돌고 오니 선물 박스를 들었던 한 손은 부르르 떨리고 온몸은 땀으로 흥건합니다. 꽤 힘들고 긴장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마음은 가볍고 수십명의 어르신과 사람들과 만난 피부와 마음의 스킨쉽의 감촉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종교 전파나 전도는 교리 이상으로 사람과 사람의 감성적인 만남이자 존재의 충돌이라 생각을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인간애를 갖고 세상의 절망에 함몰하지 않고 내일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전도는 그런 사랑과 희망의 만남입니다. 그 중심적 원형과 이미지와 논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에 얽힌 우주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극단적 몽상가나 신비주의자에 속하는 편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세상에 어떻게 적응하고 맞춰나가야 할까 고민하는 소극적인 소시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과 우주의 중간에서 어느 때면 갑작스런 희망과 무모함에 내 자신을 던질때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나는 늘 그런 무모함의 때를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내 자신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한계를 넘어서려는 그런 무모함입니다. 이런 무모함을 성경에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신앙의 용기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밤이 깊었습니다. 무모했고 감정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했던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밤이 깊었고 창문 밖은 깜깜하고 내 머릿속에도 밤의 장막이 내려와 쉴 준비를 합니다. 많은 애를 썼고 감동도 있었지만 나는 압니다. 여전히 여기저기 뻥뻥 뚫린 헛점이, 실수들이 잘못들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며칠 뒤에 생각날 잘못들이 있음을 미안함과 죄송스러움이 있음을 압니다. 그런 나의 드러나지 않은 잘못들에는 미안함과 죄송스러움으로 무릎 꿇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밤이 된 지금, 나는 온몸과 마음을 던져 무모하게 부서져 버려 마치 흙가루가 된 듯 합니다. 나의 열정과 부족함이, 나의 작은 그릇으로 수 많은 사람을 안아보려던 나의 부덕함이 뒤늦게 나를 정직하게 만들고 나를 부숴뜨립니다. 내 작은 마음과 사랑으로는 이 작은 마을 분들 조차 가슴에 품는게 버거웠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내 속에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런 부족함 속에서라도 사람을 넉넉히 맞아준 마을 분들의 삶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그런 인간애의 다리가, 그리고 절망의 세상 속에서 내일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희망이 모두의 삶 속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었듯이 나도 바라는 선물이 있습니다. 지금의 나와 하루 있었던 모든 일들은 어제의 나로 돌리고,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의 나로 신의 손에 새롭게 빚어지고 신의 호흡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 다만 그것뿐입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지금은 다만 그것 뿐입니다. 나의, 나만의 비밀스런 선물인, 주님. 주님이 나와 늘 함께 동행해 주신 것 만을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