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JOOSOO

View Original

[정신승리] 일상에 의미두기

“언덕의 두 나무를 보며”

 

1

삶이라는 주어진 시간이 흘러 가는데 당장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삶의 의미가 흔들린다. 눈에 보이지 않고 저울에 매달 수 없는 가치있는 삶도 있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위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고 오래되다 보면 사람이 조금 이상해지기 마련이다.

의미를 상실한 삶은 공허하고 허무해지기 마련이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가시적인 결과물이 없기에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자기 스스로 의미를 만들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수 밖에 없다. 좋은 말로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물리적인 세계에 의미의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라 하겠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냥 정신승리일 수 있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자신과,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세상의 작고 흩어진 일상에 대한 의미두기다. 남들이 인정이 필요없는 자기만의 인정, 자기만족이다.

"이것은 언덕 위에 있는 두 나무에 대한 생각이다". 겨울과 봄의 언덕은 쓰레기로 지저분하다. 하지만 여름과 가을의 언덕은 풀과 잎사귀로 푸르게 덮여 깨끗하다. 나무는 풍성해서 자연 그대로를 드러내고 두개의 나무는 서로 잎과 가지를 교차하며 마치 언덕 너머 새로운 공간으로 가는 길이 있는 듯 가상의 문을 만든다. 길은 사람이 걷는 이 땅의 공간이요, 길 위로 문처럼 드러난 곳은 눈으로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없되 가고자 노력하는 다른 세계와도 같다.

언덕 길을 걸어 오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의미가 사라지는 삶을 느끼는 사람은 발끝에 무게가 실린다. 자신의 삶이 하찮다고 느끼는 것 만큼이나 비례해서 발은 더욱 무거워진다. 작은 언덕조차 커다란 산처럼 느껴진다. 고개 숙여져 언덕을 천천히 내딛는 발끝만이 눈에 들어온다. 고개란 것은 한 번 숙이면 들기가 어렵다. 삶의 고개는 오르내림이 있는데 숙여진 고개에는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이 늘 머리를 끌어 당기는 땅만 보인다. 고개를 내릴 때는 삶의 중력이 발끝으로부터 고개를 끌어 내리지만 들어 올릴 때는 중력을 거슬러 올라야 하고 머리를 내리 누른 무거운 공기를 모두 들어 올려야 한다. 한 번 숙인 고개를 들기란 어렵다.

일상이란 것은 신기하다. 도저히 들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고개를 들게 만든다. 어떤 이는 세상 모든 것에는 태초의 빛이 뿌려져 있고 신의 손길이 닿아있다 했다. 때로 숨겨진 것들이 고개를 내밀어 떨구어진 고개를 들게 만든다. 늘 보던 것들 속에서 늘 보지 못했던 것이 옷자락을 보이며 내 눈을 잡아 끈다. 눈이 돌아가고 귀가 기울여지면 몸을 얽어매던 삶의 주박이 일순 풀린다. 발끝의 무게가 사라지고 내리누르던 무거운 공기도 사라진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게 만들어 준다. 어린 시절에는 온통 그런 것들 천지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고개를 조금 들면 언덕이 보인다. 길이 보이고 나무가 보인다. 길과 나무와 하늘이 아주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나를 기다린다. 무게로만 느껴졌던 삶은 사라진다. 아무 것 아닌 듯한 일상이지만 그 길을 걸어 오르는 순간은 성스러운 산을 향해 가는 순례길이 된다. 나무를 향해 다가서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스러운 시간이 된다. 성소가 된다.

이 길은 다른 이에게는 그저 일상의 길일 것이요 아무 의미없는 길일 수도 있다. 지금 내게는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공간이다. 의미있는 공간이고 내게 의미를 주는 장소다. 언덕을 넘어가면 다시금 보통의 일상적인 장소들이 나오지만 그곳을 오르고 지나가는 순간만큼은 성스러워진다.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에 선 듯한 느낌이다.

시간은 한없이 느려지고 모든 것들이 정지된 듯 하다. 생각이 없다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생각을 하고 말할 수 없다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다. 다른 이들의 눈으로 보자면 이것은 나만의 상상이다. 이제껏 있던 곳이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다. 이것은 오롯이 나만의 의미다. 누구도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나만의 결과요 나만의 일상이요 나만의 특별함이다. 모두가 관심 갖지 않을 일상에 의미를 두고 나의 세계를 정교하게 새기는 나만의 취향이요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요 힘이다.

삶이라는 주어진 시간이 흘러가는데 당장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삶의 의미가 흔들린다. 하지만 그런 순간 속에서도 비록 혼자만의 상상과 의미두기이지만 나를 특별하게 하고 의미있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들이 있다. 소중한 일상이 있다.

2

결국 둘은 같은 것이다. 하나의 경험에서 체득한 감각과 관념을 다른 세계의 경험으로 확장하는 것과, 모든 세계의 것을 아우르는 감각과 관념으로 세계의 수 많은 작은 것들에게 확장시키는 것은 달라보이지만 이미 같은 것이다. 작은 경험이 커다란 세계나 다른 세계에 적용되기는 쉽지 않다. 처음부터 큰 세상을 향해 갖고 있던 관점을 모든 작은 것들에게까지 유지하기도 어렵다.

넘기 어려운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둘에게는 이미 공유되거나 겹쳐진 부분이 많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몰입한 후에 얻어진 세계와 세계관에서 다시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그는 비약적이며 초월적이다. 자신이 아는 세계를 넘어서고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려운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은 한계를 넘어선 것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자신이 믿고 쌓아 놓은 것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뛰어넘었다는 말이다. 그는 과정을 비약적으로 뛰어넘는 모험과 자기 세계 이상의 세계를 향한 초월적 도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훌륭함과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신기하게 볼만한 특별하고 특이한 것일 수는 있지만 이것 자체는 아무런 가치 판단을 받지 않는다. 한 존재가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고 연결하는 방식일 뿐 도덕적이거나 미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와 같은 방식이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