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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가운을 입은 사제들

가운을 입은 사제들

목사가 예배를 집례할 때 가운을 입지 않고 양복이나 일상복을 입는 경우가 많다. 가톨릭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사제같은 권위를 가진 자가 아니라, 회중 가운데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자라는 신학과 전통때문이요, 신학을 떠나서 권위주의를 벗어버리고 회중에게 더 더가서려는 목회적인 방향성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도 종교적 권위를 갖고 있는 일부 교회와 목사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회자의 종교적 권위는 많은 부분에서 해체되었고 , 형식적이고 책임소재로서만 남은지 오래되었다. 아쉬운 부분도 있고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 중요한 것은 갈수록 가운을 벗는 목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직도 가운을 입는 이들을 본다. 진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판사와 검사가 그러하다.(변호사도 그런가??) 재판정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꽤나 경건하고 엄숙하며 권위를 강조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니터너머로 그런 장면을 보거나 얘기를 들을 때면, 그 모습이 마치 절대적 권위와 전통과 전례를 강조하는 고교회같기도 하고 사제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적 권위가 분해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아직도 권위가 남아있는 유일한 곳처럼 보인다.

그곳은, 그곳의 사람들은 성당보다 더 성당같고 교회보다 더 교회같은 거룩함과 권위가 있는 듯 하다. 사제가 아닌, 목사가 아닌 이들이 중세 사제와 같은 권위를 갖고 움직이고 말을 한다. 그 말의 진실성과는 상관없이, 시대와는 다르게 꽤나 이질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공부와 시험과 연수라는 고난의 광야를 통과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옷, 성의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시대의 사라져버린 종교적 권위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궁금했는데, 모두 거기로 가서 응집되어 있었나 보다. 거룩한 가운을 입은 세속의 사제들이 거기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죄있다 심판하며 못박았던 권위있던 무리들이 종교인, 정치인, 법조인이었다는 것인데, 권위의 타락이 얼마나 흉폭한 결과를 갖고 오는 지를 새삼 되새기게 만든다. 십자가의 사회적 의미는 예수를 심판한 세상의 권위의 승리였지만, 신앙적 의미에서는 세상의 성스러운 권위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요 하나님의 고발이요 심판이었다.

가운은 그 고단한 삶으로 너덜너덜해지나 결국 역사와 하나님의 보상으로 새롭게 입게될 거룩한 성의의 표상이 되든지, 아니면 빛나고 아름다운 힘과 위엄의 상징으로서 찬란히 빛나다가 역사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될 예정된 죄수복이 될 수도 있다. 종교든 사회든 절대권력은 절대부폐의 운명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힘과 특권에는 그것만큼의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가운을 입지 않은지 십년이 넘었지만 가운을 입지 않았다 해서 면책특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단 위에서 설교를 해야 하고 작고 큰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권위는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올라가며 단을 세우고 그 위에서 말을 하는 힘을 지닌다. 하지만 타락한 권위는 중력을 거스를 힘을 잃어버리고 몰락하기 마련이다. 가운을 벗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가운이 걸쳐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지막 날이 주님이 주실 성의가 될지, 꾸짖음을 받을 죄수복이 될지는 모르겠다. 아직 그 중간쯤 되지 않을까 애써 변명할 뿐이다.

시편은 복된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선언하는데, 멀쩡한 사람도 죄인과 오만하게 만드는 자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죄인과 오만한 자가 있는 곳이 바로 죄인의 길이 되고 오만한 자리가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것 저것 섞여 있으리라 생각한다. 유형의 무형의 가운을 입은 이들은 늘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 하다.

가운을 입고 앉아있는 그 자리를 자신의 욕망의 자리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그 가운을 허락한 역사와 신의 소명 앞에 응답하는 삶을 살지는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다. 모든 것이 얽혀있는 시대 속에서는 쉽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엉켜있는 실타래같다. 그 과정이 지루하다하여 실타래를 잘라버리거나 불태우는 우를 범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나, 엉킨 것을 풀어가듯이 각자의 욕망과 소명이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이들 또한 있을 것이다. 긴 실타래를 풀어가는 그 과정을 응원하며 끝을 기다려주는 포기하지 않는 소망이 필요해 보인다.

가운을 일년가야 한 두번, 장례식이나 결혼식 주례 외에는 입지 않는다. 늘 옷장 한켠에 걸려있거나 보관함 안에 잠들어 있다. 하지만 늘 보이지 않는 가운의 무게를 느낀다. 그것이 나를 보호하고 감싸주는 은혜의 무게와 십자가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내 주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 크고 주신 은혜가 귀하다. 나같이 무지하고 무능한 자를 충성되이 여겨 귀한 직분을 주시고 가운도 주셨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소명을 받을어 살아가는 것이 주신 분의 뜻에 맡게 사는 삶이요 주신 가운에 걸맞게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비록 부족한 나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와는 다르게 지혜롭고 큰 힘을 지녔지만 어느덧 과거의 종교의 몰락의 한자락을 보여주는 듯 흔들리는 세속의 사제들을 보며 그들 또한 역사와 국민의 소명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감사함에서 그리하면 더욱 좋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심판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말이다.

봄이 되어가니 가운을 널어서 햇빛에 말려야 겠다. 보이지 않는 곰팡이조차 깨끗하고 가뿐하게 사라지며 기분좋은 햇빛 냄새가 가운에 스며드는 것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