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안개 속을 걷는 사람 (전도서를 읽고서)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든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손에 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분명히 무언가를 이루었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곁에 있는데, 가슴 한쪽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자리 잡는다. 젊은 날에는 가슴 한 켠에 눌려있던 감각들이 세월이 흐를수록 조금씩 선명해진다.
전도서를 펼쳐 들었다. 내일 전도서를 주제로 하는 성경읽기 세미나에 참여해 성경읽기를 인도해야 하기에 일주일 전부터 전도서를 읽고 전도서에 관한 주석들도 더듬었다. 전도서는 성경에서 읽기 어려운 책 중 하나다. "헛되고 헛되다"는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이 책은, 삶에 관한 미래적 소망이나 신앙이 희미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바로 그 불편함 이 전도서가 가진 힘이다. 미래적 희망에 가득차 세상에 대한 핑크빛 확신만을 갖는 신앙인들에게 삶의 거친 현실을 건조하게 전해준다.
전도서를 여러 각도에서 빠르게 들여다 봤다. 삶의 기억과 얕은 지식들이 저마다 소리를 내며 전도서가 이렇다 저렇다 머리 속에서 논쟁을 벌인다. 약간의 소득은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책이 절망의 책이 아니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세계와 삶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자의 정직한 고백이었다. 그 느낀 점을 조심스럽게 남긴다. 전도서의 시니컬함과 냉소적이면서도 허무한 관점은, 신앙이 부족해서도 감사함이 없어서도 아니다. 다양한 삶을 깊이 살아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정직한 감각이다.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용기
수천 년 전, 전도자(코헬렛, קֹהֶלֶת)라는 한 인간이 그 시대의 세계와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지혜를 다 모으고, 부를 쌓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경험한 후에, 그는 이렇게 쓴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 1:2, 새번역)
이것이 패배한 자의 탄식일까, 아니면 삶을 가장 깊이 살아본 자의 고백일까.
히브리 성경 원문에서 "헛되고 헛되다"는 '하발 하발림(הֲבֵל הֲבָלִים)'이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수증기들 중의 수증기', 혹은 '바람들 중의 바람'이다. 히브리어에서 이런 구조는 최상급을 나타내는 용법이다. '노래 중의 노래(שִׁיר הַשִּׁירִים, 아가서)'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이듯, '헤벨들 중의 헤벨'은 그 속성이 극도로 강조된 표현이다.
헤벨(הֶבֶל)의 원래 뜻은 '입김', '수증기', '안개'다. 겨울 아침 입에서 나오는 하얀 김, 뜨거운 국물 위에 피어오르는 수증기, 새벽 들판을 덮은 안개를 떠올려 보면 된다. 이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진다. 그런데 잡으려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병에 담으려 해도 뚜껑을 여는 순간 이미 사라져 있다.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존재하다가, 형태를 바꾸고, 흩어지고, 사라진다.
전도자가 세상과 삶을 '하발 하발림'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단순히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냉소가 아니다. 훨씬 더 근원적인 통찰이다. 세상과 삶은 규정된 딱딱한 물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수증기와 바람 같다는 것.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삶을 파악하려 할수록, 그것은 마치 안개를 손으로 길들이려는 것처럼 어렵고 난해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무지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원래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계와 삶의 본질이다.
이 감각은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언어로 어렴풋이 비유해볼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아주 작은 입자의 세계에서는 어떤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와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나를 더 정밀하게 알수록, 다른 하나는 더 모호해진다. 물론 이것은 미시 세계의 이야기이지, 우리 삶을 직접 지배하는 법칙은 아니다. 하지만 삶의 모호함과 예측 불가능성이 단순히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세계를 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일인지를, 이 과학적 언어가 하나의 은유로 보여준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일을 계산한다. 인생을 내 방식대로 길들이려(רְעוּת רוּחַ, 레우트 루아흐 — 전도서에서 반복되는 표현으로, 직역하면 '바람을 잡으려는 욕망') 애쓴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빠르다고 해서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며, 힘이 세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높은 지위를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때와 기회가 똑같이 찾아온다." (전도서 9:11, 새번역)
수십 년을 살아온 우리는 이 구절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안다. 최선을 다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았던 날들, 반대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불쑥 찾아온 순간들. 삶은 계산기가 아니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 앞에 섰을 때 느끼는 현기증을 '불안'이라고 불렀다. 그가 이 개념을 다룬 책의 원제는 덴마크어로 Begrebet Angest이며, 여기서 사용된 'Angst(앙스트)'라는 단어는 독일어권 철학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표현이다(독일어나 덴마크어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개념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의 책에 있는 단어를 그대로 차용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불안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하는 인간의 자유 앞에서 느끼는 존재론적 현기증이다. 그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실존이 시작된다고 그는 말했다. 평생을 살아오며 이미 그 불안을 통과해 온 우리에게, 전도자의 고백은 낯선 철학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처럼 들린다.
안개(הֶבֶל, 헤벨) 속에서 피어나는 기쁨
세상이 안개처럼 모호하고 일시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이 감각을 '부조리'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그가 쓴 책 Le Mythe de Sisyphe(시지프 신화)에서 그는 'L'Absurde(라브쉬르드)'라는 프랑스어 단어로 이것을 설명하는데(프랑스어는 모른지만 역시 중요한 개념인듯 해서 원어를 차용한다) 부조리란,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상은 그 의미에 침묵으로 답하며, 대답을 해도 우리의 갈망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는 모순적인 현실을 뜻한다. 카뮈는 그 부조리 앞에서 포기도 도피도 아닌,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마주한 채로 살아내는 '반항(Révolte)'을 제안한다. 신화 속 시지프스가 영원히 굴러 떨어질 바위를 다시 밀며 산을 오르듯이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도자는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권한다.
"너는 가서 즐겁게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하나님은 네가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전도서 9:7-8, 새번역)
이 구절은 전도서에서 빛나는 반전 중 하나다. 안개 같은 세상 앞에서, 전도자는 포기도 체념도 아닌 잔치를 준비한다.. 하얀 옷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축제와 기쁨의 상징이었다. 세상이 덧없으니까, 오늘 밥을 맛있게 먹으라는 것이다. 카뮈가 "시지프스는 행복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어딘가 닮아 있다. 내일 사라질 안개라면, 그 안개가 머무는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한 밥 한 끼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가장 생생한 실체다. 오십 년, 육십 년을 살아온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거창한 성취의 날이 아니라, 평범한 저녁 식탁에서 가족과 나눴던 그 웃음이었다는 것을. 이성과 합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아폴론의 수레를 옆에 세우고, 사람들과 어울려 춤과 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먹는 바쿠스의 연회를 여는 것과도 같다.
안개 속 식탁에 앉는다는 것
전도서가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어떤 삶의 공식이 아니다. 인생을 더 잘 설계하는 기술도, 허무를 이겨내는 의지력 훈련도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조용하고, 그러나 훨씬 더 깊은 초대다.
삶을 규정하려는 손을 내려놓는 것. 세상이 수증기처럼 변하고 흐르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거스르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눈을 크게 뜨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식탁 위 음식의 냄새, 마주 앉은 사람의 눈빛, 문득 창밖으로 들어온 바람 한 줄기. 허무는 극복해야 할 적이 아니다. 허무를 정직하게 바라볼 때, 그것은 오히려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렌즈가 된다. 덧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사라지기 때문에 더 귀한 것들이 있다.
카뮈의 시지프스는 바위를 밀며 산에서 내려오는 그 길에서 행복해 한다. 부조리를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카뮈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있다. 마냥 끌려가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반복된 노동의 삶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극복해가는 삶이다. 가히 초인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왠지 멋져 보인다. 그리고 너무도 멀게만 느껴진다. 철학자들은, 아니 철학자같은 카뮈도 나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세상과 삶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는 동감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마음은 역시 나와 카뮈 사이에 깊고도 넓은 간극을 만든다.
영원(עוֹלָם, 올람)은 먼 곳이 아닌 '지금'에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중에 행복해지기 위해' 현재를 고통의 볼모로 잡고 살아간다. 시험이 끝나면, 취직하면, 집을 사면, 아이들이 크면, 은퇴하면. 그런데 문득 뒤를 돌아보면, 그 '나중'을 위해 흘려보낸 '지금'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인다. 전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달을 수는 없다." (전도서 3:11, 새번역)
'영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올람(עוֹלָם)'은 무한한 시간, 광대한 세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우주 전체를 향한 갈망을 심어 놓으셨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그 전체 그림을 다 볼 수 없다. 전체를 향한 갈망은 있지만, 전체를 볼 눈은 없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양자역학의 언어로 어렴풋이 비유해보자면, 관찰자가 입자를 관찰하는 순간 수많은 가능성이 오직 하나의 현실로 확정되는 것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올람 전체를 갈망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 하나뿐이다.
'때(עֵת, 에트)'라는 단어가 여기서 빛난다. 전도서 3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전도서 3:1-2, 새번역)
'에트'는 단순한 시간의 점, 한 순간이 아니다. 올바른 때, 충만한 때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순간(Øjeblikket, 외이에블리켓 — 덴마크어로 "눈 깜짝할 사이"라는 뜻이며, 그의 저작에서 직접 사용된 표현이다)'이라 불렀다.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접점, 유한이 무한을 건드리는 바로 그 자리. 그것은 특별한 날에만 찾아오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따뜻한 밥 한 그릇, 오늘 손자가 던진 웃음,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하나님이 정하신 에트에 알맞게 찾아온 이 작은 조각들을 감사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파편 속에서 올람의 향기를 맡게 된다.
신앙은, 여기서 한가지 가능성, 모호함 속으로 걸어들어온 확실성, 역사 속으로 침투한 영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이 안개 속에서 홀로 걷지 않는다는 것. 수천 년의 역사가 안개처럼 흘러가는 동안, 한 줄기 빛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그것이 성서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국이 흥하고 망하고, 문명이 피어났다 사라지는 동안에도, 전도자의 탄식과 시편 기자의 눈물과 선지자들의 외침이 안개 속 나침반처럼 우리에게 전해졌다. 인간의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손을 뻗었던 그 긴 여정의 기록이, 지금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끝에서,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온 한 사람이 있다. 올람(영원)이 에트(지금 이 순간) 속으로 들어온 사건. 무한이 유한의 옷을 입고, 수증기처럼 덧없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 서신 분. 전도자가 그토록 탄식하며 찾아 헤맸던 그 영원이, 역사의 안개를 뚫고 몸소 걸어 들어온 것이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다.
안개는 여전히 걷히지 않는다. 삶은 여전히 수증기처럼 흐르고 변한다. 하지만 그 안개 속에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 그리고 그 식탁은 이미 차려져 있다. 지금, 여기에.
── 참고한 책들 ──
• 성경 — 전도서 (새번역, 대한성서공회)
• 성경 — 전도서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1942
(국내 번역본: 김화영 역, 민음사)
• 쇠렌 키에르케고르, 『두려움과 떨림 (Frygt og Bæven)』, 1843
(국내 번역본: 임춘갑 역, 치우)
• 쇠렌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 1844
(국내 번역본: 임규정 역,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