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상상] 새로운 우주와 취향

그런 이상 행동 뒤에는 외로움과 고독이 숨어있음을 알고 있다. 다만 아무리 외롭고 고독에 자아가 눌리고 녹아내려 안이 터져 피부 밖으로 흘러 나오는 순간 조차도 취향이라는 브레이크는 강력하게 작동한다. 무너진 내면의 고독과 외로움, 허기와 결핍은 피부 밖 5mm 주위로 이상하고 뒤틀린 공간을 만들어 버린다. 내면이 피부 밖으로 녹아 공간에 스며들어 공간이 곧 내면의 일부이자 피부와 같이 몸의 가장 바깥이 된다. 하지만 자아를 잃어버린 채 이상한 공간으로 바뀌어 새로운 시공을 흡수하려는 그 순간 조차도, 취향은 살아있어서 흡수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한다. 굶어 죽더라도 먹고 싶지 않은 것은 먹지 않을 거라는 강한 자존심같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취향은 문화를 경험한 사람의 허기와 결핍 위에 올려진 벗을 수 없는 옷과 같은 것이다.  

피부 밖으로 뭉클 녹아내려 공간화된 몸과 의식이 녹아들 또 다른 이상한 우주를 찾아 헤매지만 그런 우주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상한 시공으로 변한 자아가 찾는 새로운 시공 새로운 우주는 깊고 넓고 감동적이며 충만해야 한다. 살과 영혼이 신비롭게 섞여서 신들이 마시는 넥타와 같아야 한다. 그런 시공과 우주만이 허기와 결핍을 채우고도 남으며 마른 눈과 가지에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 이런 우주는 태초의 신비가 있어야 하고 땀과 눈물의 향기가 서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태초의 빛과 어둠의 순간을 간직한 우주는 찾기 힘들다.

녹아내리는 자아는 찾을 수 없는 우주를 찾아 숨을 쉬지만 취향은 그것을 거부한다. 영원의 매력도 사람의 땀냄새도 게다가 도시의 세련된 음악도 없는 이상한 우주는 먹고 마실 수가 없다. 세상에 널려있는 고층빌딩 조각과 자동차 타이어같은 것들에 녹아 들기는 싫다. 영원한 것과 짧은 순간 속에서도 깊고 넘치는 기쁨과 의미를 마시고 녹아들기 원한다. 깊은 지하실을 경험한 사람은, 높다란 빌딩에서 세상을 내려다본 사람은, 모든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유롭지만 그 어느것에도 깊은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병에 걸린다. 그가 만족할 수 있는 세계는 자아조차 없는 자신의 시공이 녹아드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우주가 시공화된 이상세계일 뿐이다. 내면의 것을 채우고도 남을 만한 신비와 수 많은 신비를 담고 있는 또다른 이상한 세계일 뿐이다. 

[일상] 사람

[상상] 슬픔이 차오르기도 전에

[상상] 슬픔이 차오르기도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