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포도나무
처음 흙에 심겨지고 자라날 때의 충만함이 소중하다. 사람들과 열매 이전에 있던 나만의 모습을 기억하고 과거의 생명의 씨앗을 지금 내 가슴에 심는 것이 위로가 된다.
뒤편 언덕에 있다. 주렁주렁 열렸던 포도들은 진즉 농부 손에 따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갔다. 남은 것은 겨울을 나기위한 앙상한 가지와 한 때 내게도 있었을 주렁주렁 열렸을 포도알을 상상하게 만드는 종이봉투 뿐이다.
포도열매가 아무리 멋지고 탐스럽고 맛도 좋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더라도 그건 내가 아니다. 나로부터 나온 나의 일부이지만 내 전부가 아니다. 여름이 지나고 포도알이 떠나가니 새들이 날아와 앉아도 농부는 새를 쫓지 않는다. 아니 포도나무에게도 포도나무가지에게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포도를 원하지 포도나무를 원하지 않는다. 농부는 열매가 열리는 포도나무를 원하지 열매없는 포도나무를 원하지는 않는다. 포도열매가 그치자 사람들의 관심도 그쳤다.
하지만 빛나는 흙보라빛 포도알이 사라진, 사람들의 무관심이 일상인 이 생활이 좋다. 과거의 기억들이 얹혀진 종이 봉투의 추레한 모습에, 사람들의 무관심과 일상에 존재하지 않게 있는 지금이 좋다. 구겨지고 늘어진 종이봉투는 흡사 수의와 같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이제는 앙상해진 몸을 풍성히 덮어 놓은 누런 수의같다. 잊혀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잊혀지기 전에 잊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다. 죽음이 이르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좋고, 열매를 풍성히 맺을 때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생각해 보는 것 또한 도움이 된다.
처음 흙에 심겨지고 자라날 때의 충만함이 소중하다. 사람들과 열매 이전에 있던 나만의 모습을 기억하고 과거의 생명의 씨앗을 지금 내 가슴에 심는 것이 위로가 된다. 잊혀지고 버려지는 것에 서운해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가슴 속 언덕 위에 나조차 잊어버린 내 모습을 다시금 심어야 한다. 나만이 보고 즐거워 하는 나만의 열매를 가꾸어야 할 때다.
다가올 겨울을 기다린다. 하늘은 자주 회색빛이 되고 바람은 차가워진다. 비어있는 가지와 가지사이로 바람이 자유롭게 다닌다. 무엇인가 많이 붙어있을 때는 나를 지나치던 바람이 이제는 내 가슴 속으로 불어 온다. 차가운 만큼이나 상쾌하다. 가벼워진 만큼이나 살아있음도 더 깊이 느껴진다. 포도나무에 붙어있고 팔은 가볍게 하늘로 향하고 새들과 바람이 자유로이 스며드는 지금이 좋다.
[일상] 낙원상가
그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몇 있다. 천원짜리 몇장이면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순대국밥 집들과 여기저기 모여 있는 노인들이다. 비록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어있지만 저 분들도 한 때 종로를 힘차게 걸어다닌 중년이었을 거다.
한 때는 한국 악기 시장의 메카와도 같았던 종로3가 낙원상가. 어느덧 나도 30년째 이곳을 왔다갔다 했다. 당시에는 지나가던 사람도 꽤 많았는데 2000년대 들어서 온라인 시장 활성화로 낙원 상가는 많이 침체되었다. 고객을 호갱으로 만드는 상술이나 낙원상가가 아닌 다른 곳에 전문적인 악기 샵이 생기는 악기시장의 시대변화를 고려하지 못했던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근래 다시 보니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느낌이다. 온라인에서 다시금 오프라인을 찾는 사람들이 조금 늘었다고나 할까. 오래 전부터 악기 업계에서 일을 해오던 대형 악기상이 아직도 거기 있고 가게들은 온라인마켓을 겸업하거나 여러 문화 행사를 유치하거나 고객에대한 기본적인 상도의를 지키려는 노력도 보인다.
그래도 그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몇 있다. 천원짜리 몇장이면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순대국밥 집들과 여기저기 모여 있는 노인들이다. 비록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어있지만 저 분들도 한 때 종로를 힘차게 걸어다닌 중년이었을 거다. 그 때 나는 짧은 스포츠 머리에 잠자리 안경을 낀 채 어리버리 돌아다니는 중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중년이 되었다. 많은 곳이 변했고 사람들은 변해가지만, 그 때 그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그 풍경은 여전하다.
할아버지들 틈에서 순대국을 먹고 거리에 앉았다. 어제의 차가운 날씨에 익숙해져서인지 태양도 바람도 참을만큼 따듯한 초겨울 날씨였다. 거리 한 쪽에서는 뭔가 즐거운 일이 벌어졌는지 크게 웃는 할아버지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보다가 어느 덧 일어 날 때가 되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났다. 아직도이곳저곳 모여있는 노인들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들 나이가 되면 나는 무얼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들었다. 낙원상가는 오랜 시간에 많은 것이 변해가면서도 그 때와 다름없는 여전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이가게 저가게를 기웃거리며 기타줄 몇 개를 구입하고는 다시 내가 사는 곳으로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종교] 아이들, 재미와 권위
"보이지 않는데 있는 것은?"
아마도 답은 "공기"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의 답은 달랐다.
아들은 렛잇비 Let it be 노래의 후렴구 한 대목을 개사해서 답을 한다.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영혼... 안보여도 있어요 모두"
"보이지 않는 데 있는 것?"에 대한 아이의 답이었다.
이제 초등2학년 아들에게 교회 초등 4학년 여자아이가 퀴즈를 냈다.
"보이지 않는데 있는 것은?"
아마도 답은 "공기"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의 답은 달랐다.
아들은 렛잇비 Let it be 노래의 후렴구 한 대목을 개사해서 답을 한다.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영혼... 안보여도 있어요 모두"
"보이지 않는 데 있는 것?"에 대한 아이의 답이었다.
아이는 두가지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하나는 TV의 개그프로그램이고 하나는 예배의 설교다.
개그콘서트를 거의 한달에 한번 볼까 말까 하는데 혹시 보게 될 때면, 아이는 "렛잇비" 코너를 정말 좋아했다. 종종 길을 가다가 나와 함께 맘대로 개사해서 노래를 부르며 서로 낄낄 대곤 한다. 개다가 Let it be를 비틀즈의 원곡으로 들려줬는데 노래를 거의 끝까지 듣더니 "노래가 좋다"고 평가를 내린다. 늘 강한 락스타일만 좋아했는데 비틀즈 노래들은 꽤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어쟀든 아이는 평소에 즐기고 좋아하던 개그 프로그램과 렛잇비 노래에 가사를 바꾸어 답을 했다.
아이는 또한 예배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듯 싶었다. 최근에 교회학교에서는 성경의 두번째 책인 출애굽기(이집트 탈출기)를 읽어 나가며 얘기를 나고 있다. 특별히 오늘 아침에 읽은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광야로 이끌고 나온 모세가 시내(시나이)산에서 야훼 하나님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불과 연기와 번개와 천둥이 번쩍 번쩍 치는 산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정말 눈과 귀를 뚫어지라 집중하며 재미있게 들었던 아이였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과 책상과 이런 보이는 것들과는 달리 형체가 없다고 가르쳐 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도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 속에는 작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님은 이런 물질이 아니기에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에너지 그 자체도 아니라고 알려줬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본 장면이 성경에 많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런 것이라고 말해줬다.
아이들이 듣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나름 잘 이해를 해 줬다. 그러니 아이의 머릿 속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볼 수 없지만 "언제나 계신 분"이라는 내용이 머리에 꽉 박힌 것이었다.
더군다나 새벽에 아이가 깰까 싶어 조용히 기도하러 나가다 보면 새벽에 깨어서 어둠 속에서 거실에 앉아있는 아이와 마추친 적이 몇번 있었다. 오늘 새벽도 그러했다. 그럴 때면 아이는 "아빠 하나님께 기도하러가?"라고 말하곤 한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는 아빠를 보며 아이는 신이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의 대답 속에 부처님이 있다는 것이 여러모로 재미있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니 그것은 나중에 생각해 보련다)
무엇이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가? 라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해본다.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재미와 권위"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아이는 재미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아이는 권위자에게 영향을 받는다.
아이가 재미있게 여기는 것이 TV나 만화, 운동이 될 수도 있고 노래나 그림이 될 수 도 있다. 모든 아이들이 다 비슷하지만 아이마다 더 특별하게 나타나는 부분들이 있다. 또 한 아이라도 자라나는 시기에 따라 재미있어 하는 분야나 주제가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것이 아이에게 큰 영향을 준다.
또한 아이는 권위자에게 영향을 받는다. 운동을 잘 안하던 아이가 태권도장에 나가더니 태권도 사범님이 매일 줄넘기를 하라는 말을 듣고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줄넘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밥 먹을 때면 물을 너무 자주 먹거나 밤 늦은 시각에 잠들 때 뭔가를 많이 먹고 자는 습관이 들어서 약한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을 하는데, 밥 먹을 때 힘들더라도 물을 적게 먹고 잠자기 전에는 적게 먹으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는 자신이 존경과 두려움을 갖는 대상에게 영향을 받는다.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강한 영향을 끼치지만 자발적이지 못하고 파괴적이다. 하지만 아이가 존경을 갖는 대상은 아이에게 자발적이면서도 생산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재미와 권위, 이것이 아이에게 영향을 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부모는 이 재미와 권위라는 다소 융합되고 공존하기 어려운 역할로 아이 앞에 서있는 존재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재미있는 것을 즐기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누린다. 그리고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것을 찾아가고 즐기면서 자기 정체성과 독립성을 갖는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살아가면서 부모의 기준과 일관성있는 태도를 보며 권위를 느낀다. 그 권위 속에서 변해가는 자신의 안정감을 찾고 자신이 속한 가정과 삶에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재미와 권위 속에서 배우고 익히고 즐긴 것들은 아이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그 아이의 일부가 되고 아이의 특별한 개성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아이가 그 재미와 권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또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법을 경험하고 시간을 지내며, 어느덧 자기 스스로 재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그런 어른스러움을 가지는 아이로 자라나기를 기도한다.
요즘 아이는 공부 때문에 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몇번 빵점을 맞고 20점을 몇번 맞더니 스스로 충격에 빠져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 하다. 부모는 크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조금 실망한 것 가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는 충추듯 쓰던 글씨들도 정성들여 쓰고 공들여 숙제를 해가려고 한다. 내 욕심에는 자기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재미를 느끼며 스스로에게 권위자가 되는 것을 상상도 해보지만, 그것은 그냥 부모의 환타지일 뿐.아이는 아직 아이라 생각한다. 부모의 자상한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의 눈과 마음에 맞춰서 게임과도 같이 함께 끌어주고 밀어주는 도움이 필요할 때이다. 다만 아이가 조금 조급해 하고 있으니 그 아이의 마음을 잘 헤어려가며 아이의 수준에 조금더 진일보 함이 있을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할 듯 하다. 재미와 권위를 잃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영향, 재미와 권위". 그냥 두 아이가 장난스레 나눈 퀴즈와 그 대답을 가지고 너무 거창하고 뭔가 깊은 내용이 있는 것처럼 길게 얘기를 쓰고,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원래 종교인의 습성이 그렇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여러가지 성찰과 통찰력을 발휘하고 싶은 그런 호기심과 옅은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내 기준에서 종교인들이란, 사소한 것들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나, 반대로 크고 어려운 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일종의 인생의 겉멋이 들린 부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긴 글도 실은 종교인의 그저 재미와 권위의 일환이다.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지식과 데이터를 통해 분석하는 방법이 아니라, 귀차니즘을 핑계로 하지만 실재로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한 탓에, 그저 직관적인 관찰과 성찰을 통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는 주관적인 성찰의 결과일 뿐이다. 소소한 일들에 의미를 두는 재미와 그런 결론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기준과 권위를 부여하려는 그런 작은 인생게임과도 같다 하겠다.
나도 아직 아이와 같이 많은 대화 속에서 나를 드러내고 그리고 배워가는 과정에 있다. 배움이라는 과정 속에서 아이와 나 사이에 있는 30년이 넘는 격차는 단순히 숫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배움의 속도와 내면화에 있어서는 아이들이 어른들을 더 앞지른다. 그러니 아이를 나의 삶의 거울과 스승삼아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아이를 보는 것을 재미삼아, 그리고 아이를 내 삶의 권위자로 삼아 살아가는 것 도한 그리 나쁘지 않은, 아버지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삶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에게 재미진 한 주가 되길 기도한다.
[일상] 먼 곳을 보기
멀리 보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쉽지 않다.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의지와 호기심도 중요하지만, 그 먼 곳을 볼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붙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아이는 간혹 멀리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제작년에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느라 한 여름밤을 홀딱 지샜다. 별자리 지도를 보며 밤하늘 별들을 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신화 이야기를 해 주느라 시간을 보냈다. 작년에는 고모부가 사준 장난감 쌍안경으로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여름을 보냈다. 밤하늘 별과 쌍안경에 아이보다 아빠가 뽐뿌를 받아 이곳 저곳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며 당장이라도 망원경을 살 것 같이 호들갑을 떨며 한해를 지냈다. 올 해는 멀리있는 것들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한 듯 싶다. 한달 전에 습지공원에 가서 망원경을 들여다 본 것이 다였던 것 같다. (아... 월식이 일어나 레드문이 뜨던 날 하늘을 보긴 봤지만.).
어쨌든 습지공원에 가서 쌍안경을 눈에 대고 멀리 있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아이는 잠시 흥미를 잃어버린다. 옆에 있는 부모는 그런 상황에 아이에게 적절한 코칭을 해주길 원한다. 때로는 엉뚱하게 가르칠 때도 있고, 방법이 잘못되어서 아이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에 아이는 부모의 코칭을 받아들인다.
"먼저 네가 보고 싶은 것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망원경으로 보면 알기가 어려워."
아이는 저쪽을 보고 싶다고 한다.
"그럼 몸을 움직이지 말고 숨도 천천히 쉬면서 망원경을 그 쪽으로 향하게 해봐"
아이는 그렇게 해보지만 망원경도 높이 있고 뭔가 잘 안된다. 의자라도 갖다 놓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보기에는 어렵다. 옆에 있던 엄마가 아이를 붙잡고 움직이지 않게 도와준다.
"뭐가 보여?"
그제서야 아이는 뭔가가 보이는지 망원경으로 뭔가를 계속 본다.
한두번 과정을 되풀이 하더니 아이는 스스로도 먼 곳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체득했는지 혼자서 이곳 저곳을 보려 한다.
멀리 보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쉽지 않다.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의지와 호기심도 중요하지만, 그 먼 곳을 볼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붙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멘토가 되거나 코치가 되거나 부모가 되거나 비슷한 부분이 있다. 바로 앞의 것들에 충실하게 함께 하면서도 보다 멀리 있는 것들을 바라 볼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거다. 앞에서 가리키든지 뒤에서 가리키든지 방법은 저마다 다양하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과 몸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몸과 마음. 그 과정을 체험하고 습득하면 그 후부터는 스스로의 눈으로 바라본 저 멀리 있는 것을 마음 속에 그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인생과 사회라는 것을 멀리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인정받고, 돈을 벌고 좋은 직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내 인생의 미래를 어떻게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설계를 해야 하는지 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는 그저 늘 착하고 성실하게 정직하게 살라는 것을 배웠고, 책을 많이 읽고 어른들에게 늘 인사하고 웃는 얼굴로 살라는 법만 배웠다. 그래서인지 멀리 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 몇 권의 책을 읽고 웃고 인사하면서 곧이곧대로만 살아왔던 듯 싶다. 그래서인지 멀리 보지 못하고 살아온 내 삶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깊은 한숨을 쉬며 아쉬워하기도 했따.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어머니가 가르쳐주시고 말씀하신 것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로서는 최선의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것은 분명 내게도 최선의 길이었다. 내게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주지는 않았지만 내게 멀리 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주었다. 뒤에서 나를 안아주는 품은 없었지만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나를 사랑하는 땀과 눈물이 늘 있었다.
아이를 품어주고 그 몸과 마음을 붙잡아주며 먼 곳을 바라보게끔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요, 그리고 리더나 멘토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때로 그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형적인 틀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삶과 인생은 참으로 신비로워서 전혀 그렇지 않은 것 속에서 전혀 그런 것보다 더 뛰어난 힘과 지혜를 주는 신비를 보곤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어디를 봐야 하는지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내 맘과 몸은 안정감있게 고정되어 있는지도 생각해 본다. 내 뒤에는 그 무엇이 나를 감싸고 지켜주고 있는지 궁금해 내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저 멀리 그리고 내 뒤를 보더라도 모든 것들이 다 보이고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만은 아닌 듯 하다. 몸과 마음도 완전히 안정적인 느낌도 아니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다하여 충만하지 않다하여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결핍된 것도 아님은 분명하다. 앞을 멀리 볼 때 두려움은 갈 수록 줄어들고 뒤를 돌아 보면 결핍된 날들이 아니라 생각만해도 감사한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들이 아름답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분명 아이도 완전하지 못한 부모에게서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이에게 못내 미안함이 된다. 하지만 나또한 부족함과 결핍 속에서도 결국은 나를 붙잡아 준 분과 나를 붙잡아준 분들의 사랑을 알고 걸어가고 있으니, 아이도 결국은 더 힘찬 걸음으로 저 먼곳의 날들을 바라보고 걸어가고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나를 사랑한 가족들이 그리고 나를 믿어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처럼 아이에게도 그런 가족과 하나님이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아이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란 생각도 한다.
이 땅에 태어난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로 살아갈 수 있는 이는 없다. 모두가 나를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이들의 바램과 이야기에서 새롭게 출발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허무함과 무질서의 밑바닥에서 우리의 영혼을 만들고 믿어주는 하나님의 원대한 이야기로 부터 출발한 고귀한 존재라고 믿는다. 아직도 우리들이 바라봐야 할 먼 곳이 있고 걸어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 우리들은 그곳을 바라 볼 수 있고 그리고 걸어 갈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그곳을 걸어간 이들의 발자취가 눈 앞에 있고, 무엇보다도 뒤를 돌아보면 함께 했던 소중한 날들의 감사한 이들의 눈과 미소가 있다. 지극히 종교적인 상상이지만 나는 상상하며 믿는다. 나를 향해 양 손을 벌려 저 과거로부터 저 먼 미래로 나를 이끄는 신의 못자국난 손바닥이 앞과 뒤에서 이끌어 주고 있다.
하루가 지나갔다. 낮에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아는 것 마냥 자신있게 가르쳐주던 나는 홀로 방안에서 내 자신을 들여다 본다. 아이는 잠들었고, 이제 내가 저 멀리 봐야 할 차례다. 하지만 아이만큼 잘 볼 수가 없다. 하루 앞도 저 먼 곳도 보이지 않고 뒤의 수 많은 미소와 기억들도 사라진 듯 보인다. 하지만 두렵거나 슬프지는 않다. 멀리 볼 수는 없지만 저 앞에는 희망이 있고 내 뒤에는 사랑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그 때마다 다시 한번 울고 웃는 그 벅찬 삶의 순간들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보면 내게는 확실히 현실보다는 믿음이 강하고, 예측보다는 소망이 더욱 강한 힘으로 느껴진다.
오늘 밤에는, 삶과 죽음에 그리고 역사를 나 보다 앞서 간 이의 발자국을 더듬으며 먼 곳을 바라보며 지금 이곳이 틀리지 않은 곳임을 확인하며 편안히 눈을 감고 싶다. 저 먼 곳의 그림들이 지나온 날들의 아름다운 추억들과 더불어 함께 있는 그런 꿈을 꿀 수 있을 듯 하다.
삶은 신비롭고 내일은 아직도 희망이다.
[일상] 아이자랑
자녀를 둔 분들을 만나면 대개 자식 자랑이 어느새 대화 주제로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내 아들에 대해 크게 자랑할 것이 없다. 아이는 아직도 바늘 시계 보는 법을 잘 모르고 구구단은 1단과 2단 밖에 모른다. 받아쓰기는 빵점을 종종 맞는다.
자녀를 둔 분들을 만나면 대개 자식 자랑이 어느새 대화 주제로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내 아들에 대해 크게 자랑할 것이 없다. 아이는 아직도 바늘 시계 보는 법을 잘 모르고 구구단은 1단과 2단 밖에 모른다. 받아쓰기는 빵점을 종종 맞는다. 열심히 뛰긴 하지만 달리기도 꼴찌도 곧잘 하나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 아이가 꼴등한다고 아직도 빵점을 맞는다고 하는 얘기에 다들 웃으며 좋아한다. 일종의 안도감을 갖는 느낌이다.
내 아이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을 다 소화하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니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교 끝나면 학원에 가서 예습 복습하고 집에 와서 또 공부하다가 다시 학교로 가는 아이들도 있다. 모두가 다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부만이 다가 아니야, 성적만이 다가 아니야”를 외치며 아이를 단지 자유롭고 행복하게 키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가끔 아이에게 좀 더 공부를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아내와 열띤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결국 많이 떠들고 놀고 웃고 함께 얘기하자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지금은 더 놀고 웃고 자야할 때라 생각해서다. 아이를 가질 때 즈음부터 아이를 세상에 맞춰서 키우기 보다는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종종 갈등이 있긴 하지만, 이런 과정자체가 아이에게 분명 다른 의미로 성공할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 하늘의 별과 같고 태양과도 같았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자연의 찬란한 빛을 잃어버린다. 형광등과 같이 백열등과 같이, 그리곤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같이 변해버린다. 그런 삶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면 좋을 것이다. 어찌보면 나는 아이에게 사회적인 성공을 위한 도움을 줄 수 없기에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가르쳐 주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성공이 아니라 행복한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내가 정말 행복한 삶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리 말하는게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에 대해 할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은 사람의 행복은 단지 문학과 동화 속에서만 존재할 뿐, 대부분은 권력과 돈이 최고의 행복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말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또한 우리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지도 알고 있다. ‘ 이게 전부는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돌아서면 모두가 원하는 그것에 아이를 맞추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사회적으로 낙오자가 될 것 같고 실패자가 될 것같다는 불안함에 쫓긴다. 모두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긴 한건가 내 자신에게 되묻곤 한다. 물론 깊고 오랜 고민 끝에 결국은 다시 처음마음으로 돌아가지만 말이다.
아마 내가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었다면 이런 고민은 아이의 사회적 생존과 존재 자체에 대한 갈등이 아니라 좀 더 행복한 삶에 생산적인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없는 삶에서 한 인간의 행복을 고려하고 아이의 사회적인 미래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적인 갈등이자 고민거리가 된다.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이 아니라, 나중에 아이가 감당해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아이가 자랑스럽다. 열심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럼도 알고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도 알아가고 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얘기하고 화나고 좋은 것도 얘기하고 늘 재잘대고 노는 그 모습이 내게는 꽤나 자랑이다. 아이가 자라도 이런 자랑스런 마음이 늘 그러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