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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아이를 믿음

지난 주 아이는 개학을 했습니다. 개학 첫날 학교에 가서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방학 동안에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고 말이죠. 선생님이 뭘 그렇게 재미있게 놀았냐고 물었더니, 아빠하고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고 웃으며 자랑을 하더랍니다.

지난 주 아이는 개학을 했습니다. 

개학 첫날 학교에 가서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방학 동안에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고 말이죠. 
선생님이 뭘 그렇게 재미있게 놀았냐고 물었더니, 아빠하고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고 웃으며 자랑을 하더랍니다.

그 얘기를 전해듣고아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자그마한 행복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제게는 살아가는 큰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방학 동안에 학교 숙제만 하고 다른 공부는 하지도 않고 하루 종일 아빠하고 놀기만 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방학 동안에 특별한 일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소소한 일상들이었습니다. 매일 아이하고 운동하기, 격투기 하기, 말싸움 하기, 아이패드로 놀기, 밥 먹기, 간식먹기, 차 타고 잠깐 드라이브 하기, 헬리콥터 날리기, 논밭 거닐기, 오락실가서 오락하기, 친척 누나들 놀러와서 며칠간 같이 자며 놀기 등등 정도였습니다. 좀 더 특별한 일이라고 한다면 엄마가 일하는 중학교로 엄마와 함께 며칠동안 가서 도서관에서 책읽고 다른 선생님들하고 얘기 나눈 정도가 다였습니다. 공통점은 아이가 하기 싫은 것은 거의 없었고 아이가 원하는 것들을 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덕분인지 아이는 방학 한달동안 키도 몸무게도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더 안정감이 생기고 의젓해졌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제 자신의 변화였습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아이를 공부시켜야 하지 않느냐며 걱정하는 분들이 여럿있습니다. 구구단 3단도 못외우는 아이를 보면서 제 자신도 몇개월 정도 흔들렸는데 아이와 놀고 대화하고 지내다 보니까 그런 걱정이 점점 사라지게 되더군요. 어느덧 아이의 성실함과 열정, 가능성을 믿게 되었고, 그 아이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믿게 되어서 그런 듯 했습니다.

아이는 아직 구구단 3단을 외우지 못합니다. 공부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도 않습니다. 가끔 시험을 잘 볼 때도 있지만, 여전히 반에서 바닥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다니는 학원인 태권도 학원도 설렁설렁 놀러 다닙니다. 특별히 신체적으로 뛰어난 운동능력을 발휘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마음도 몸도 자라나고 있는 아이를 보게 됩니다.

요즘은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얘들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놀리던 얘들 얘기를 하며 화가 많이 난다고 했던 아이인데 이제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툭툭 치던 아이에게 화가 나고 열이 받는다고 했는데 이제는 괜찮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 학교에 갈 일이 있어 갔던 차에 교실 밖에서 아이를 지켜봤습니다. 아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또래아이가 얘기를 하면서 계속 아이 머리를 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예닐곱번을 계속 해서 머리를 치며 얘기를 합니다. 아이가 어떻게 반응하나 봤습니다. 아이가 그 또래에게 뭐라 얘기를 합니다. 아마도 그만하라고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또래아이가 또 머리를 치려고 하자, 거꾸로 그 아이 머리를 손으로 잡고 앞뒤로 흔듭니다. 그러자 그 또래 아이가 다른 손으로 아이 머리를 치려고 하자 아이는 그 또래 아이 손을 잡더니 뿌리쳐 버리고 뭐라고 한마디 합니다. 그리고 아무일 없다는 듯이 책을 계속 읽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없었어?"라고 묻자, "응, 아무일 없었어"라고 대답을 합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는데 아이가 대답을 안해줍니다. 결국 집에가서 엄마하고 얘기를 하다가 엄마가 돌려 돌려 얘기를 하니 그제서야 대답해 줍니다. 내용인즉슨 별거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또래아이가 자꾸 머리를 치기에 자기도 머리를 치면서 그만 치라고 얘기를 했다는 것이죠. 그게 다였습니다. 작년처럼 다른 아이의 폭력에 과민반응하거나 분노하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느덧 아이는 마음도 몸도 컸습니다.

나와 아이의 문제는 믿음인 듯 합니다. 내가 아이를 믿는 믿음, 그리고 아빠가 자신을 믿고 함께 한다는 아이의 믿음. 그 믿음이 사람을 강하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태권도 사범님보다 힘이 세지도 않고 학교 선생님보다 아는것이 더 많지는 않지만, 늘 자기 얘기를 들어주고 자기와 함께 싸워 줄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빠는 아이가 모든 것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기 감정과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고 해야 할 것들을 해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개학 후 1주일이 지났습니다. 아이는 기침이 심해서 약을 먹으며 골골하고 있지만, 빨이 낳아서 아빠하고 놀 생각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리고 3학년부터는 영어를 배우는데 요즘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엄마하고 함께 영어공부를 할 생각에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도 나의 삶도, 모든 것이 더디기는 하지만 그것이 느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삶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내 인생에 더불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아이도 나도 분명 더욱 강하고 유연하게 자라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은 이런 저런 생각과 함께,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주신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이런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그리고 함께 해주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내게 큰 기쁨과 의미를 주었듯이 언젠가는 나도 어린아이처럼 되어 내 주님과 사람들에게 삶의 작은 기쁨과 의미가 되어주는 그런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기도를, 이 깊은 밤 잠시 하늘로 띄워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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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양의 해. 묶인 어린양

양은 구약성서에서 고대 이스라엘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 제물로 바쳐졌던 짐승 중 하나입니다. 주로 개인이나 공동체의 죄를 대신해 신에게 바쳐져 죽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 집단이나 공동의 잘못괴 죄를 대신해서 한 사람을 희생시킬 때 그 사람을 두고 "희생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양은 구약성서에서 고대 이스라엘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 제물로 바쳐졌던 짐승 중 하나입니다. 주로 개인이나 공동체의 죄를 대신해 신에게 바쳐져 죽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 집단이나 공동의 잘못괴 죄를 대신해서 한 사람을 희생시킬 때 그 사람을 두고 "희생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희생양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책감과 부도덕한 어두움을 드러내면서도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면책을 받곤 합니다. 이런 희생양은 정치나 경제에서도 자주 보입니다. 마치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이 약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과 죄를 짊어지게 하는 것이죠. 비슷한 의미로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의미죠.

 

그림은 17세기를 살았던 화가 Francisco de zurbaran 이 그린 "묶인 어린양" (The bound lamb)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뭐, 실제 그림을 보지는 못했지만, 현대의 극사실주의 화가들의 그것과 비교해도 뒤쳐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림의 양은 힘이 없고 연약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발은 이제 곧 제물로 바쳐질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묶여 있습니다. 묶여 있는 발이 마치 십자가의 형태를 이루게 한 것은 작가의 의도적인 구성같습니다. 십자가에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 예수를 상징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복사본 레플리카로 집에 걸어 놓고 싶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올 해가 양의 해라고 하는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죽어간 희생양들에 감사하며,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양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희생하는 것을 손해본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과 행동들도 조금은 더 변해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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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아홉살 아이와 종교

대개 문제는 부모에게 있다. 아이가 살아가면서 겪어야할 소중할 것들을 지켜봐 주기 보다는 너무 성급하게 사회적 성공과 부모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강요하려고 한다. 물론 그런 삶이 아이의 사회적 성공과 행복을 보장한다면 그런 교육도 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신도 없고 또 그렇게 해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도저히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를 못하겠다. 

하루는 아이가 반 아이들 얘기를 하면서 무심결에 말한다. 
"아빠 걔는 하나님 잘 믿어"
내가 대답한다. "왜... 그렇게 생각해? 다른 얘들 위해 어려운 것도 하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해?"
아이가 다시 말한다.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하나님 잘 믿는지는 모르겠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인 형식과 종교적인 삶을 구분하고 있었다.

며칠전이었나 종교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엄마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이에게 묻는다.

"성현아... 너는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걸 믿니?"

"아니." 아이가 짧게 대답한다.

엄마는 살짝 당황했지만, 부드럽게 호기심에 차서 다시 묻는다. 
"그럼 너는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고 인도하신다는 거 안믿어?"

"음...." 
왠지 엄마가 조금 심각해지니 아이도 뭔가 대답을 잘못했나 싶어 뒤늦게 다시 생각을 한다. 
"그게... 뭐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엄마는 살짝 당황. 
"그럼 너 하나님이 계시다고 안믿는거니?"

아이는 .. "..."

이 때 내가 말한다. 
"그러니까, 안믿는 건 아니고 믿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하나님이 막 보호하고 인도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지?. 어쨌든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말야. 그런 의미 아냐?"

아이가 멋적게 웃으며 말한다. "맞아. 그런거야. 안보이니까 있는지 없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거야. 자기가 노력하며 사는게 중요한거야"

내가 말한다. "내 말이... "

아이는 이제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사람들 생각에는 부처님과 불교,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같은 과학자들도 있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에게는 종교적인 어떤 교육을 특별히 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다른 부모들은 어릴 때 부터 기도훈련 말씀 외우기 등등 여러가지를 하기도 하지만 나는 게으른 탓도 있고 또 여러 이유 때문에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단지 식사 때 감사 기도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종교 교육의 다다. 아빠가 살아가고 하는 일들이 종교적인 것들인데 아이에게까지 더 종교적인 스트레스를 주기 싫어서이다. 어찌보면 아이하고는 다른 종교나 신화, 동화나 과학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듯 하다. 노력의 중요성, 함께 하는 재미, 인생의 즐거움, 우주와 생물의 신비, 신화와 영웅들, 리더쉽과 정치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즐겁다. 종종 아이가 성경에 있는 것들도 물어 오곤 하지만 그 또한 아이에게는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들중 하나이지 특별히 종교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아닌 듯 하다.

오늘은 눈이 많이 왔는데 하루 종일 눈을 치우지 않다가 아이가 오고 난 후 밤이 되어서야 나가서 눈을 치웠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가려니 아이도 같이 옷을 따라 입는다. 너는 왜 옷을 입냐고 하니, 그냥 아빠하고 함께 나가려고 입는다고 한다. 난 그냥 산책하고 눈쓸려고 나간다고 하니, 아이도 함께 산책하고 옆에 있겠다고 한다. 결국 이것 저것 챙겨입고 마당으로 나가서 비를 챙겨들고 눈을 쓸어댔다. 아이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이곳 저곳 눈 위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눈을 다 쓸고 나서 눈덮인 뒷동산에 올라갔다. 아이도 함께 언덕을 올랐다. 어둔 밤이이지만 들판이고 산이고 하얀 눈이 쌓인 것이 보였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지만 듬성 듬성 별들이 빛나는 것도 보였다. 오늘따라 쓰레기를 태우는 집도 없어서인지 공기가 하도 맑고 차가워서 피부를 투명하게 뚫고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폐속 까지 마음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랄까.

언덕을 내려오면서 아이가 말한다. "아빠. 그냥 이렇게 아빠하고 함께 있는게 좋아". 가슴이 뭉클해지고 아이를 잡은 손에 힘이 저절로 가 아이 손을 더 꽉 잡게 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성장하고 성숙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것대로 하기를 원하곤 한다. 더욱이 종교적으로 열성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더하다. 그런것들이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필요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고 혹 의식적으로 필요한 종교적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와의 경험을 통한 함께함과 홀로됨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하는 기쁨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경험한다. 거기서 사랑과 용납을 배우고 용기와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아이는 또 홀로 있게 된다. 학교에서 길에서 자기 방에서,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9살의 삶에서 홀로됨을 경험한다. 아이는 그 홀로됨의 경험 속에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고 채워가는 법을 배워간다. 그 홀로됨의 승패는 부모와의 함께함에 연결되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요즘들어 부쩍 아이가 커간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도 표정도 태도도 그렇다. 변하지 않고 성장이 멈춰있는 것은 오히려 부모인 나다. 아이의 성장에 맞춰 나도 더 유연해지고 아이에게 더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9살의 아이는 비록 부모가 생각하는 형태의 신앙적인 대답을 하지는 않지만 그 아이만의 신앙과 삶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경험들은 일생 동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의 자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9살의 아이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그런 아홉살의 삶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대개 문제는 부모에게 있다. 아이가 살아가면서 겪어야할 소중할 것들을 지켜봐 주기 보다는 너무 성급하게 사회적 성공과 부모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강요하려고 한다. 물론 그런 삶이 아이의 사회적 성공과 행복을 보장한다면 그런 교육도 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신도 없고 또 그렇게 해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도저히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를 못하겠다. 단지 나는 하나님을 믿듯이 아이를 믿고 싶을 뿐이다. 저 들의 나무들이 저리 잘 자라듯이 믿고 바라고 기도해주고 격려하는 가운데 아이는 분명 자신의 삶과 믿음을 찾아서 굳건하게 잘 자라 줄 것이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어찌보면 아이는 내게 주신 또 하나의 기회인 듯 하다. 사람에게 희망을 걸지 않게된 염세주의 비스무레한 종교인이 되어버린 내게, 하나님은 다시 한번 사람에게 희망을 걸고 살라는 그런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기대하지 않고 기도하며 바라는 사랑이라면, 아이에게 대하듯 그런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대한다면, 분명 아이가 변해가듯 다른 이들도 조금은 더 빛나는 모습들로 성숙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꿔본다. 왜 사람은 믿는만큼 사랑받는만큼 변해간다고 말하지 않는가.

집으로 들어오니 손에 낀 털장갑에 눈이 많이 묻어있다. 장갑을 벗어서 벽에 툭툭쳐 눈을 털어내니 뒤에서 똑같은 모양새로 장갑을 벗어 벽을 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내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스타트랙 다크니스를 보고있자니 아이가 들어와 앞에 앉아 같이 영화를 본다. 작년만 해도 재미없다고 안보더니 재미있어하면서 본다. 그리곤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함께 본다. 물론 한참 영화를 보던 중에 엄마에게 걸려 같이 혼나고 영화를 끄고 아이를 잠자리에 재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이는 웃으며 잠이 들었다.

완벽하지도 온전하지도 않았지만 꽤 만족스런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2014년의 12월이 저물어가면서 이제 아홉살 아이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 하루가 소중하고 아름다운 날들이다. 이 시간들을 아이가 충만히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덩달아 그런 아이를 통해 나또한 이 시간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체험하길 원한다. 분명 아홉살의 아이가 살아가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또한 나의 시간이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한다. 이 시간이 내게 감사와 위로가 되었듯이 언젠가 아이의 저 먼 미래의 시간에도 같은 감사와 위로가 함께 하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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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선물

순수한 목적은 욕망을 넘어서며 차가운 불길을 따스한 온기로 만드는 힘이 있다. 열쇠의 처음 온기는 흔들리는 눈과 손을 잠잠하게 만들어 준다. 새로운 세계를 욕망이 아닌 아름다움과 가치로 바라 볼 수 있는 따듯한 지성을 허락한다. 감정과 욕망의 열기가 호기심과 가치의 눈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선물이 들어있는 문을 열 수 있는 때다.

선물은 즐겁기도 하지만 부담이 되기도 하다. 더하여 생각지 못했던 선물은 새로운 것들에 대한 감각을 갖게 해줘서 억눌렸던 욕망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선물을 선택할 열쇠를 손에 쥐어졌다. 열쇠는 지나치게 무겁다. 당혹스러움과 부담이다. 선물이 주어졌다면 부담과 당혹스러움의 시간은 짧게 지나가고 그 감정들은 온전히 고마움과 의미의 감정들로 무게감있게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물을 고를 수 있는 열쇠는 그 시간을 길고 무겁게 만들어 버렸다.

무거움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문을 연다. 열쇠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적당한 문들을 찾아 열어야 했따. 하지만 새로운 문들을 열어 보았을 때 거기 펼쳐진 것은 새로운 선물들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바로 사람과 남자들에게 내재된 욕망의 세계였다. 무지함은 사람을 선하고 착하게 만든다. 무지하고 온순하게 미친 사람은 착하고 바보같다. 하지만 지식과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도 하지만, 그를 약삭빠르게 만들고 욕망에 충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새로운 것들은 호기심과 찬양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소유와 쾌락의 욕망이 되기도 한다.

순수한 목적은 욕망을 넘어서며 차가운 불길을 따스한 온기로 만드는 힘이 있다. 열쇠의 처음 온기는 흔들리는 눈과 손을 잠잠하게 만들어 준다. 새로운 세계를 욕망이 아닌 아름다움과 가치로 바라 볼 수 있는 따듯한 지성을 허락한다. 감정과 욕망의 열기가 호기심과 가치의 눈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선물이 들어있는 문을 열 수 있는 때다.

주어진 선물은 감사와 그것에 대한 의미만을 가지면 되지만, 선물을 고를 열쇠를 받는다면 단지 감사와 의미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능동적으로 선택하며 감사하고 의미를 찾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에 그러하다. 특별한 의미 이상의 특별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든다.

모두가 다 끄덕일 수 특별함이지만 나또한 끄덕일 수 있는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 무거워야 하고 튼튼해야 하며, 30분이라는 스피치 시간을 상징할 수 있어야 하고, 밤에 몇번씩이나 눈을 뜨면서 새벽기도 시간을 확인하거나 집회중 불이 꺼진 상황에서 시간을 가끔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전혀 비실용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도 주어진 열쇠 안에서 열수있는 선물이어야 한다.

결국 몇 주를 보며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해 줄 선물을 준비했다. 내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맘에 드는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통해서 모르던 세계와 감성도 알게 되었다. 세계는 참 넓고 물건은 많고 사람들의 삶도 다양했다. 낯설지만 드러난 감춰진 소유욕과 가치에 대한 탐욕은 또한 내 안의 한계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금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또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덕분에 왼손에 조금더 무게가 실리게 되었고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많은 것을 깨닫고 보게하고 알게 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의 무거움을 알게 해준 선물에 ...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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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경외감

자연은 두렵고 무섭지만 무한한 매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한결같고 깊고 크고 강하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섬세하고 변함없다. 기쁠때는 기쁘게 나를 맞아주고 슬플 때는 슬프게 나를 맞아준다. 사심이 없이 나를 대해준다.

경외라는 말이있다. 독일의 신학자인 루돌프오토는 이 누미노제라는 말로 이 경외를 표현한다. "두렵고 매력적인 경험"이 바로 경외라는 것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던지 간에 이 경외감은 모든 종교의 출발이 된다. 두려움만이 아니라 매력적이어야 한다. 두려움은 엎드려지고 눈을 감게 만들고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매력은 일어나게 하고 눈을 뜨게 하고 더 가까이 가게 한다. 종교체험은 이 누미노제의 경험이다. 두려움과 매력.

이런 종교체험과 유사한 체험이 바로 예술적 체험이다. 하나의 작품 앞에서 자신과 세계가 몰락하고 멸망당하고 해체되는 두려움, 그렇지만 그 속에서 또 다시 재구성되고 재창조되고 재해석되는 것의 매력이 이어진다.

모든 작품들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고 모든 종교적 형태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이 누미노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특별한 힘을 발산하곤 하는데 그것을 "카리스마"라 하고 카리스마가 풍겨나는 것을 독특한 아우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세상은 호기심과 재미의 대상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세상이 모든 것들이 두렵고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서만 머물게 된다면 아이는 그 대상에 대해 회피하거나 억압하거나 다른 형태로 망상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바람직한 관계는 두려움을 느낄만한 권위를 가진 대상에게 매력도 함께 느끼는 관계일 것이다.    

자연은 그러한 좋은 예가 된다. 자연은 두렵고 무섭지만 무한한 매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한결같고 깊고 크고 강하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섬세하고 변함없다. 기쁠때는 기쁘게 나를 맞아주고 슬플 때는 슬프게 나를 맞아준다. 사심이 없이 나를 대해준다.

바다로부터 배운다. 예닐곱살에 어딘지 모를 부산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나가 깊은 물을 보고 느낀 두려움, 그리고 20여전전 바다를 가서 느낀 그 푸르름, 10여년 전에 바다를 가서 들은 소리와 자유로움. 모든 것들이 내게 무언의 교훈과 체험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 아이가 바다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그 앞에 앉아 있다. 아이는 무엇을 느낄까. 궁금하다. 그 아이가 느끼는 것들이 궁금하다. "느낌이 어때?". 그냥 침묵하면 좋으련만 옅디 얕은 아빠는 굳이 그 느낌을 말로 물어본다. 아이는 대답이 없고 그냥 한번 웃는다. 아빠보다 나은 듯 하다. 섣불리 경외감을 말로 표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것들은 가슴과 머리속에 살아 움직인다. 그저 보고 듣고 느낀 그 누민노제를 가슴에 담고 살다보면 삶의 어느 순간 두렵고 매혹적인 것들이 나를 억누르고 흔들어 버릴 때 그 바다가 가슴에서 머리에서 튀어나와 다른 모든 얕은 두려움과 매혹들을 쓸어가 버릴 것이다.

바다에서 돌아온지 몇주가 지났다. 하지만 그 경험들은 아이에게나 내게도 무언의 소리와 그림처럼 가슴에 남아있다. 여전히 눈과 귀를 흔들어 마음과 삶을 혼란시키는 것들이 주변에 펼쳐지지만, 잠시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때의 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아이인지 나인지 모를 한 아이가 그 바다에 서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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