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종교] 붉게 물든 하루

오후 예배가 끝났습니다. 이제 다음 주 부터 두달동안은 오후예배가 없습니다. 매 주 교회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데 주로 젊은 여자 신도들이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늘 남편 눈치봐가며 매 주일 힘들게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근 6년이상을 점심을 준비하자는 파와 점심을 없애자는 파가 나뉘어서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3년 전부터 여름 한 철에만 오후예배를 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낸 의견이긴 하지만 그닥 마음에 쏙드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찬성파도 반대파도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들 마음에 들어해서 이제는 연례 행사로 잘 정착이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우들을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나니, 1시 40분. 수동기어의 멋이 있지만, 엔진과 기어의 균형이 맞지 않는데서 오는 덜컹거림이 마초스런 이스타나 15인승을 몰고 일부러 말을 타듯이 바운스 바운스 퉁퉁거리며 차를 몹니다. 어린시절 험한 시골길을 소달구지를 타고 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몸이 아프거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교회에 못나온 분들이나 혹은 따로 대화가 필요한 분들을 찾아갑니다. 보통 심방이라고 하죠. 심방을 해야 할 분들을 머리속으로 떠올리며 나 홀로 심방길에 나선 겁니다. 심방이라고 하지만 어떤 집은 가서 그냥 얼굴만 보고 나올 때도 있고, 어떤 집은 찬송하고 기도할 때도 있고, 어떤 집은 예배를 드릴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할지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춰서 그리고 사람들 상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예전에는 찬송가도 준비하고 성경구절도 미리 찾아서 가곤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미리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상황이 익숙함에 게을러진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또 막상 가정에 가보면 준비한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다른 까닭에, 이제는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고 그냥 갑니다.

오늘은 아퍼서 못일어나는 할머니들 몇 분 찾아가서 기도해 드리고, 가정사가 겹친 마을 일로 약간의 일이 생긴 할아버지의 얘기를 한시간 들으며 섭섭한 마음을 조금 풀어드렸습니다. 말은 심방이지만 실제 내용은 얘기를 들으러 가는 것입니다.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 일종의 감정노동인지라 처음에는 많이 힘들긴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려하거나 가르치려는 마음없이 그저 상대방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감정을 확인해 주는 정도만 하면 큰 문제는 없는 듯 합니다. 대화의 방법론은 간단한 상담기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하고 상황이 나아질지에 좀 더 집중해서 질문을 하거나 합니다. 대개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이 더 잘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대답을 합니다.

문제는 그런 이성적이고 긍정적인 판단을 가로막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의 과잉상태인지라, 긴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감정을 해소하는 것에 목표를 둡니다. 얘기를 계속 하다보면 다들 한 얘기를 하고 또 하고 또 합니다. 같은 얘기를 한시간 두시간 할 때도 있죠. 오랜 시간 얘기하는게 긍정적이지 못할 때도 있지만 모두들 오랜 시간 얘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다들 그리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곤합니다.

그리고 얘기가 깊어지고 대화를 오래하다보면 어느 순간 함께 얘기하고 있는 내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표현하기도 합니다. 감정의 과잉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만 몰두했던 사람이 대화와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갖는 여유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문제를 좀 더 너그러운 태도로 대하게 됩니다.

오늘의 대화도 그런 식으로 끝이 났습니다. 지난 3년간 한 것이 대부분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다들 말투도 행동도 더 온유해 지셨습니다. 3년 동안 겉으로 큰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안으로는 나름 작은 변화는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은 변화에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감정을 다루는 긴 대화를 하고나면 마음에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감정 노동의 후유증인데요, 오늘이 조금 그랬습니다. 마음이 조금 너덜너덜 해지는 느낌이랄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길에 보니 산딸기가 탐스럽게 많이 달려있더군요. 이곳에서는 산딸기는 인기가 별로 없습니다. 다들 복분자를 따  먹기도 하고 따놓은 복분자를 내게 주기도 하시지만 산딸기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주에는 복분자 한소쿠리를 얻어서 우걱우걱 빨간물을 흘리며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눈앞에 산딸기들이 달려있는 걸 보고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 앞에 앉아서 하나씩 하나씩 따먹고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따먹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30분이 훌쩍 지나가 버리더군요. 나 혼자서 꽤 넓은 곳에 퍼진 산딸기를 다 따먹어버렸습니다. 허리를 펴고 일어서니 허리는 뻐근하지만 힘이 조금 빠져버렸던 마음은 어느새 그랬냐는듯이 힘이 납니다. 산딸기의 시큼하고 달콤한 그 맛이 내 맘에 새 힘을 준 듯 합니다.

교회로 돌아오니 오늘 맥추감사절이라고 장식해 놓은 과일들이 단상에 놓여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은 한 해의 반을 인도하시고 좋은 소득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날입니다. 교우들은 특별한 날 특별한 헌금을 한다고 5천원, 만원, 2,3만원씩 특별한 헌금을 준비합니다. 어떤 이들은 교우들의 밭에서 따온 과일과 사온 과일들을 그럴싸하게 바구니에 담아 강단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나서 나보고 그 과일들을 다 가지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전에는 그리 말씀 하실 때가 있었지만, 필요하신 분들도 있는 것 같고 또 가져가기도 뭐해서 그냥 놔두곤 했습니다. 그러면 예배가 끝나고 알아서들 잘 나눠 가시는 듯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모두 다 가져가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고 예배가 끝나고도 바구니를 치우지 않으시고 통째로 그대로 놓고 가셨습니다.  그깟 과일 바구니 하나 놓고 가는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냐 할 수있겠지만 내게는 나름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름 풍성하게 과일과 채소가 담긴 바구니를 통채로 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바구니 안에 담긴 물건의 가치가 크고 작고 문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준다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일 바구니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나름 재미있고 의미있는 변화라는 생각이 기분이 꽤 좋습니다.

기분 좋은 마음에 교우가 주신 복분자 한 그루가 눈에 띄어서 마당 한켠 흙을 파고 복분자 나무를 심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땅에 잘 적응해서 뿌리를 내리기만 바라며 물을 흠뻑 주었습니다. 올해와 내년 잘 자라면 내년 이나 그 너머 해에는 새빨간 복분자 열매를 몇 소쿠리는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분자를 다 심고 허리를 드니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붉게 물든 얼굴과 빨갛게 변해버린 목들, 붉은 눈물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붉게 물든 마음과 얼굴 앞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하루가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마음과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온통 붉은 것들 뿐입니다. 붉디 붉은 사람들과 함께 있엇고, 붉디 붉은 피같이 붉은 산딸기를 따먹고, 속이 빨갛게 잘 익은 수박도 얻고 발갛게 익은 토마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붉은 열매를 맺는 복분자를 심었습니다. 다소 머릿속이 뜨거운 하루였지만 또 다른 붉은 것들이 내 맘과 생각을 편안하게 해준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저쪽 산너머에도 붉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습니다. 세상도 마음도 생각도 모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곳은 아무일 없다가도 많은 일들이 있지만, 꽤 만족스런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날들이 이곳에서 매일 이렇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꽤 괜찮은 하루, 감사한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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