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밤 고구마

[일상] 밤 고구마

밤은 젊은이에게는 관능이 되겠지만 나이든 이들에게는 관념을 선사한다. 관능의 때에 관념에 빠지는 이들이 적게 있을 것이고, 관념의 때에 관능을 그리워 하는 이가 더러 있을지도 모른다. 밤은 저마다의 욕망과 희망, 결핍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밤이 주는 것 중에는 관능과 관념을 넘어 모두에게 공평한 유혹도 있다. 야식이다. 밤에 먹는 음식은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먹는 것의 기쁨을 준다. 값 비싸고 고급스런 곳에서 먹는 음식이 아니어도 살아있음에 감사와 기쁨을 주고 포만감을 준다. 낮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밤이 주는 유혹이자 축복이다. 야식은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다. 밤을 포기할 수는 있어도 야식을 포기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야식으로는 라면이나 국수가 제격이다. 때로는 우유 조금과 빵이 좋다. 과일은 맛있기는 하지만 대개 포만감을 주지 않는다. 과일 중 유일하게 만족함을 주는 것은 잘익은 포도다. 포도는 몇 알만 입에 넣어도 머리 속에는 기쁨의 탄성이 알알이 튕겨 다닌다. 신기한 과일이다. 

그런데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젊은 날의 야식은 다만 아침에 부은 얼굴을 요구할 뿐이지만 나이든 사람에게 야식은 활명수가 없다면 소화불량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활명수가 맛있게 느껴지고 야식을 먹을 때마다 소화제 생각이 난다면 위장이 찬란한 젊음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욕망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넘치거나 제 자리를 잃어버리면 문제가 된다. 야식이 늘 좋다해서 밤에 먹고 싶은대로 다 먹으면 정작 나중에 먹고 싶을 때 먹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먹고 싶어도 좀 참아야 하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아주 조금만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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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도 허기가 찾아왔다.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의 유혹이다. 먹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도 먹고 싶다. 결국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봐야 한다. 라면이나 빵을 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택한 것이 고구마 하나와 포도 몇 알이다. 고구마는 생각보다 작고 길고 속에 섬유질이 많다. 먹기 수월치 않다. 한입 베어 물고는 입에서 명주 실을 뽑아 내듯 고구마 실을 뽑아 낸다. 내가 마치 누에고치가 된 듯 하다. 잘만하면 작은 손수건 한장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목이 막히면 포도를 한두알 집어 넣어 준다. 단 물이 터져 나오며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몇 알을 집어 넣다보면 허기가 사라진다. 머리 속이 맑아지고 몸에 힘이 생긴다. 포도의 단맛이 힘을 준다. 방금 전까지는 솥이라도 다 먹어치울 듯이 배가 고팠는데 어느덧 배가 채워졌다. 아니 뱃속으로 들어간 것은 얼마 없다. 허기가 채워진거다. 더 많이 먹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충분히 먹은 듯 하다. 더 먹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뭔가 아쉬워 먹다 남은 고구마를 바라본다. 오늘 못먹은 야식은 내일 먹기로 한다. 오늘 할 일을 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하는데 꼭 할 일이 아니라면 미뤄도 좋은게 많다. 내일은 또 내일의 야식이 찾아 올거다. 오늘은 포도 몇 알로 만족했으니 먹다 남은 고구마는 내일 소환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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