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귀신의 잔, 주님의 잔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아울러 귀신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아울러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1절)
1
신약성서에 나오는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떠나 잘못을 저지르곤 했다. 교회 안에서는 “주님의 잔”을 마시며 신비한 기적과 은사를 추구하면서도, 자기들끼리의 파당을 만들어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상대편을 음해했다. 교회 밖 사회생활에서는 세상의 가치인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이방제사의 자리에 참여하며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는 일또한 있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이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바울의 눈으로 볼 때 이는 세속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신앙이었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지만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다. 기독교인에게 신앙 안에서의 자각과 자아성찰은 주님의 말씀인 성경과 주님의 말씀으로 교훈하는 성령의 감동에서 온다. 성경을 바르고 넓게 읽으며 그 뜻을 마음에 새길 때 주시는 성령의 감동이 사람을 새롭게 하고 성장시키며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한다. 신앙의 순수성은 각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가운데 저마다의 색깔과 개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나게 만들고, 참 사람답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재미있고 매력적인 삶으로 만들어간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감동과 의미를 잃어버리고 다른 것을 쫓기 시작할 때부터 부정적인 의미로 신앙의 세속화가 시작된다. 영혼이 병들기 시작한다. 영혼이 병든다는 의미는 동방신학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 살아가는 죄인의 삶을 산다는 의미다.
2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는 윤리관은 크게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것과 "무엇은 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영적인 영역과 윤리적인 영역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는 복잡하며 상황은 저마다 다르기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의 분류는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며 시대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선한 가치와 극단적으로 악한 가치는 변하지 않으며, 이들은 애매모호한 가치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지만 물과 기름이 만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콜로이드 상태로 혼재한다. 다만 물은 자신의 극성을 따라 물끼리 뭉치려고 할 뿐이고 기름또한 그러하기에 거시적으로 물과 기름은 자신의 순수성을 유지한다. 영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서 윤리적인 회색지대가 존재하지만 신앙인의 관점에서 "적어도 이것은 해야지", "그래도 이것만은 아니지"라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돈과 정치라는 도구는 주님의 뜻이 구현되는 "나"라는 삶에서 나의 진정한 색깔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유용한 기준이 된다. 돈과 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기준은 무엇일까? 성경은 여러 관점을 제공하지만, 고린도서에서 바울은 바로 "주님의 잔"과 "귀신의 잔"을 분명한 기준으로 보여준다. '주님의 잔'은 성찬식 때 받는 주님의 잔을 말하며, 그 의미는 주님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받아들이며 주님의 가르침을 나의 양식과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귀신의 잔'은 우상숭배할 때 먹고 마시는 잔을 말하며, 그 의미는 돈과 사회적인 성공과 권력을 위하여 귀신을 섬기는 자리에 함께 하며 그들과 교제하는 것을 뜻한다.
술잔은 하나의 물질이지만, 술잔이 건내지는 자리와 말과 분위기와 장소가 술잔에 의미를 부여한다. 술잔은 영적이고 사회적인 은유의 메타포가 된다. '술잔을 나눈다'는 말은 그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겹치도록 하며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작은 제의, 곧 예배나 제사 혹은 기념식을 치룬다는 의미다. 술잔을 주고 받는 자리에서 위계질서가 확고해지며 내적인 일치가 이루어진다. 마치 한국인의 밥상에서 어른과 아이의 위계질서가 생기고 한솥밥을 먹는 가족으서의 정체성이 공교히 다져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남이가. 한솥밥 먹는 처지에" 이런 느낌이다.
3
고린도는 로마 시대의 주요한 도시 중 하나로서 로마의 문화가 융성한 곳이었다. 이방제사와 연계되는 술자리는 사회적 결속을 공교히 하는 자리로서 돈과 권력이 오가는 자리이자 성공으로 가는 교제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디오니소스적인 축제에서 술의 신 바쿠스는, 건내주는 술잔을 통해 사람의 욕망을 해방시키면서 하나가 되게 하며 집단적인 감정의 상태를 만들어 준다. 바쿠스의 잔은 사회적인 결속의 의미가 강했다.
반면에 사회적인 교제를 공교히 하는 술자리와는 다른 의미로 이방제사와 연결되는 술자리또한 있었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귀신의 잔"이라 말할 수 있다. "귀신의 잔"이 넘겨지는 자리는 사회적인 교제의 자리 그 이상의 힘을 갖는다. 분위기와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더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된다. 이성과 신화로서의 바쿠스가 아니라 진정한 실체로서의 영적인 바쿠스 혹은 귀신을 숭상하는 정서 속에서 시작하거나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영적인 힘은 당시 로마 시대의 철학이자 종교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와 원소들을 숭배하며 그 힘으로 현재의 운명을 바꾸고자 했던 실재적인 종교의 모습이다. 이 신앙은 기복신앙으로 그 근본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누리는 건강과 성공, 부와 명예에 있다. 타인과 인류를 위한 윤리와 인간애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점성술이나 무속적인 기복신앙이 지배층과 호사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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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의, 아니 로마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인 술자리와 영적인 타락의 술자리라는 경계와 갈등 속에 있었다. "주님의 잔"을 경험한 이들은 이전의 사회적인 교제의 자리에서 주고받는 "바쿠스가 주는 잔"을 이질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같은 포도주이지만 “주님의 잔”과는 내용이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고 의미가 다르며 목적이 다르다.
돈과 권력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받아들일만한 가치 중립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갖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니요, 오만한 자리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지만 그 자체가 오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자가 “주님의 잔”을 마시며 그 잔에 참예하는 순간 이전에 아무 문제가 없던 세상의 것들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자아성찰을 한다. 선한 양심을 갖게 하는 성령의 감동이요, 선한 의지를 추구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은혜다.
하물며, "주님의 잔"을 경험한 이들이 "귀신의 잔"을 생각할 때면 과연 어떤 것들을 느꼈겠는가. 당연히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지"하는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바울의 태도가 바로 그렇다. 그런 영적인 선택은 사회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귀신의 잔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회생활을 같이 할 수도 있고 사회적인 술자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귀신의 잔을 추구하는 잔을 받지도 말며 그들을 쫓아가며 살지도 말라 한다. 바울에게 있어 그것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넘지 말아야 할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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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개신교에서 술은 금기가 되어있지만 이제는 알게 모르게 허용이 되는 무의미한 규칙이 되고 말았다. 음주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이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술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술이 주는 사회적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분별하는 것이다. 그 술잔이 부정과 청탁의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술인지, 가정을 파괴하는 음란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이뤄지는 것인지 혹은 고단한 몸을 이끌며 저녁에 부부가 마주하며 하는 것인지, 장성한 아들을 축하하며 서로 맞잔을 드는 부자간의 모습인것인지, 술잔에 담긴 의미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도 바울의 경고는 유의미하다. 주님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한다.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집안이 다 예수 안믿고 나만 교회를 다닐 때, 아버지 제사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귀신이 되어서 자리에 오기에 제사하고 절하고 섬겨야 한다 하셨다. 나는 거부하다가 몇번을 맞았는데 결국 어머니가 나중에는 그냥 추도식을 하며 찬송하고 기도하자 말씀을 하시기 까지 이르렀다. 그 때 어머니에게 물었다. "내가 기도하고 찬송하면 그거 누구에게 드리는 거예요". 어머니 말씀은 "네가 믿는 하나님도 듣고, 이곳에 있는 아빠도 듣는거지". 나는 그것조차 거부한 채 "지 아버지도 모르는 나쁜놈. 교회가서 다 버렸어"라는 말을 들은 채 빗자루로 맞아야만 했다. 당시 나는 주님의 잔을 마시며 삶의 큰 위로와 소망을 얻었기에 "주님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었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술잔"은 이미 어릴 때 받았고 나또한 "아버지께 드리는 술잔"은 어릴 때 이미 치뤘기에 돌아가신 분을 영적인 존재로 생각하며 술잔을 주고 받을 이유는 없었다. 지금은 제사에 대해 사회적인 인식도 달라졌고 나또한 많이 관대해졌지만 그 중심은 여전히 같다. 주님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는 없다.
6
인간의 욕망은 그치지 않고 역사는 반복된다.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쾌락과 정치적 파당성, 그리고 돈과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회적이고 영적인 술자리는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새벽 계명성처럼 높고 크게 빛나는 이들이 바쿠스의 잔을 찾아 다니고 교제하며 귀신의 잔을 나눈다. 귀신을 잔을 섬기는 이들이 찾아가 서로 손을 내민다. 그리고 거룩한 곳에서 다시금 주님의 잔을 높이 든다. 리더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리면 그를 따르는 이들은 대부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도 되는 것으로 여긴다. 자기 혼자만 귀신의 잔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이들을 귀신의 잔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세상의 가치와 돈과 권력을 따르는 삶, 굉장히 아름답고 선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게 볼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되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럴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머리를 깍지 않고 포도주를 먹지 않기로 서약한 나실인처럼 자신의 삶이 하나의 은유가 되고 메타포가 되어서 세상을 향한 주님의 잔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혹 그럴 수도 있고 그런 잘못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 없는 것이요 보통의 그리스도인이 혹 그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주님께 부름받아 주님의 고난의 잔을 받아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7
바울의 이야기는 분명하다. 귀신의 잔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때로 그로 인해 손해를 입을 때도 있지만 그러하더라도 그것을 주님을 믿는 것으로 인한 고난으로 받아들이며 영적인 순수성을 유지하라 말한다. 오히려 그 의미를 잊고 있던 주님의 잔, 복음에 참예하는 사람으로 살라한다. 순전하게 주님을 쫓는 이들과 교제하며 주님의 생명의 복음을 먹고 마시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살라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지극히 따라야 할 것을 가르친다.
주님의 잔이 멈춰있다. 코로나로 성찬식은 정지된지 세번째 해에 들어섰다. 코로나 시절에 맞는 세번째 고난주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주님의 잔이 멈춘 틈을 타 많은 이들이 귀신의 잔에 참여하며 온통 술에 취해 있다. 주님의 잔만 멈춘 것이 아니라 그 잔이 주는 생명과 의미 또한 멈춰진 듯 하다. 독주에 취해 있어 주님의 잔이 무엇인지 주님의 은헤가 무엇인지도 잊어 버린 채 살아간다. 더 이상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보지 않고 주님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조차 없다. 남은 것은 비고 빈 허탈한 심령에 채우는 분노와 허무의 술 뿐이다. 빈 것에는 반드시 무엇인가 들어차기 마련이다. 그것이 주님으로 부터 오는 것인지 세상으로 부터 온 것인지를 바라봐야 한다. 나는 이미 잠겨가고 있지만 더 이상 내가 잠겨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취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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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 눈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냉장고로 간다. 아침 10시 정도가 되면 늘 졸음이 온다. 유리컵에 얼음을 채우고 생수를 하나가득 붓는다. 얼음을 휘휘 저으니 얼음이 유리컵을 때리며 땅땅땅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물을 들이킨다. 입 안에서 목구멍으로 식도를 타고 위까지 차가움이 내려간다.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오며 입에서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감사합니다. 주님"이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생수가 배에서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절로 기도가 나온다. 곧잘 부엌에서 기도를 하곤 하는데 오늘은 냉장고 앞에서 기도를 한다. "생수가 되신 주님. 나로 생명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나또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술과 귀신이 주는 잔을 쫓지 말게 하시고 참여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주신 잔을 나의 생수요 생명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의 생명의 은혜를 십자가의 은혜를 내게 채우소서"
세상을 보니 공중으로 구원의 날개를 단 듯한 커다란 잔이 날아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잔은 사람들을 담아내고 있다. 바닥을 보니 낡은 잔이 피빛 포도주를 쏟으며 바닥에 떨구어져 있다. 무엇을 손에 잡고 무엇을 마시며 살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다. 술은 저마다의 효능이 있는지라 기분을 좋게도 하고 분노하게도 하고 열정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모두들 분명 술에서 깰 때가 온다. 잠들어 있던 모든 이들이 깨어나며, 바닥에 떨구어진 잔은 높이 들리어 커다란 철의 잔으로 바뀌어 세상의 가치와 우리 인생의 무게를 저울질할 역사의 심판의 때가 올 것이다.
그 때에 그분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실까. "너는 내가 준 잔을 잘 가지고 있니? 그 포도주를 너의 유일한 생명의 생수로 마시고 있었니?". 그 때 나는 두려움을 느낄까 아니면 부끄러우면서도 감사하며 설움에 복받쳐 그 앞에 엎드려 경배드릴까. 나로서는 자신할 수가 없는 일이다. 다만 바라고 원하기는 주님께서 그 때 주신 그 잔이 여전히 내 손에 들려있기를 그리고 그분이 주신 그 포도주만이 나의 유일한 양식이 되기를 붙잡고 바랄 뿐이다. 이천년 전 제자들에게 하셨던 그분의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20장 22절)
주님의 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것이요, 귀신의 잔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한 것이다.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