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상상] 센치멘탈

[상상] 센치멘탈

이 직업은 일종의 상담직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일로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가족문제, 직업문제, 진로문제, 질병, 정신적인 문제로 찾아온다. 대하는 자세는 늘 진지해야 한다. 내 속의 것을 모두 열고 상대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에 일정한 규칙이 없다는 거다. 상담사나 병원은 진료나 상담을 예약하고 돈을 내고 진료를 받는다. 상담이 필요한 사람은 작건 크건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관계와 치료에 규칙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직업군에서는 그런 규칙이 무너진지 오래되었다. 권위는 사라졌고 사람들의 필요만 남은 이상한 형태가 되어버렸다. 자주있는 일은 아니지만 새벽 3, 4시에 전화를 하고 아침 6시에 집문을 두드리고 밤 11시에 도와달라 요청한다. 정신적으로 급박하거나 일상에서 이탈한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정해진 규칙은 없어 보인다. 이 직업에 있는 이들 모두가 이런 생활을 하지는 않고, 나 또한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이런 식으로 살지는 않는다. 이 직업군에서 일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사회적인 이방인들을 대하는 건 늘 내 몫이었.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이런 일들이 좀 더 자주 일어났을 뿐이다. 이 생활이 그다지 힘들거나 어렵지는 않다. 가끔 짜증이 날 때는 있을 뿐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른바 정신병원과 상담은 먼 나라 얘기다. 계속적으로 상담받을 만한 돈도 충분치 않다. 그렇기에 무식해보이는 원초적인 종교의식이긴 하지만 이 직업 안에서 해주는 종교적 상담도 꽤 도움이 된다. 병원을 몇 년 다니면서도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환자에게는 철야기도와 함께 금식, 그리고 노동을 권한다. 노동을 하면 태양을 보고 몸이 움직여지고 배 고픔을 느낀다. 금식을 하면 거꾸로 생의 의지가 생긴다. 밥먹기 싫어서 굶는 것과 금식을 작정하고 굶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주여! 주여!" 천 번을 큰 소리로 외치다보면 이 전에 들리지 않던 소리와 모양이 보인다. 내 안에 생각과 정신적인 소음이 제거되고, 환시와 환청과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다. 

늘 귀신을 보며 신통방통하게 다른 사람의 과거까지 맞추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과의 상담도 재밌다. 그런 일들은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다. 신통방통한 영적인 능력들은 대개 극단적으로 억압되어 살아온 사람이든지, 청소년기에 정체성의 혼란스러움 혹은 유년시절에 경험한 세계와의 뒤틀어짐과 연관이 있다. 그들의 감각은 일반적인 사람들을 초월한다. 감각은 세밀하고 깊어서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미묘함을 깊이 느낀다. 영적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을 만큼 특이하다. 그런 특이함을 얘기할 곳은 무당집 말고는 아무데도 없다. 그들의 존재의 이면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큰 상처도 있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깊은 공허와 현실 세계와 연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혼의 유리함이 깊게 깔려 있다.

노동과 종교적 제의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류의 활동과 정신의 뿌리다. 분석은 분석할 수 있는 기준으로만 분석할 수 있다. 분석할 수 없는 것들은 분석할 수 없는 것들로 다가설 수 밖에 있다. 일종의 신비주의다. 종교는 윤리주의의 뼈대를 갖고 있지만 그 속은 여전히 신비성을 내포한다. 신비성이 없는 윤리종교는 윤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종교를 윤리 그것으로만 인식하는지 모른다. 윤리가 무너진 종교는 사회적인 터를 잃어버리지만 신비가 없는 종교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윤리나 신비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정서의 동일시다. 세상과 사람들에대해 진지한 만남을 갖다보면 동일화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상대방의 감정과 상태와 접촉하고 그 감정과 상황을 함께 느끼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감정의 전이가 일어난다. 상담가들은 이런 감정의 전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담 스케쥴을 조정하거나 자신을 상담해주는 상담가를 따로 두곤 한다. 진일보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직업군은 그렇지 않다. 상담가의 회복과 안위를 고려하지는 않는다. 극단적이다. 할 수 있는 만치 낮아지다가 죽는게 목표처럼 보인다. 진짜로 순교당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면서 매일 죽는 것을 감내하며 사는게 근본적인 자세다.

늙어가는 분들의 허탄함을 느끼고, 죽어가는 이들의 죽음을 느끼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느끼다 보면 나또한 그런 고통과 죽음과 억울함에 동화되어 그 구덩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깊은 기도와 찬양과 금식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때로 그리고 자주 이것들로부터 이탈해서 죽음과 같은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삶의 윤기가 사라지고 거칠고 남루해진다. 표정이 사라지고 눈은 항상 사람 너머의 어떤 부분을 바라본다. 사회적으로 멋있어 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회와 들판 사이, 인간과 신 사이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에 서게 된다.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유랑자의 마음이 된다.

문제는 진지함이다. 너무 정직하게 세상과 사람을 받아들이면 그 충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사무적이 되고 직업적이 된다. 누구보다도 진지했던 사람들이 누구보다 더 세속적이 되는 까닭의 한 부분이다. 적절한 거리감을 갖기란 어렵기도 하면서 원칙적으로 그래서는 안되는 거다. 이 직업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만나는 창시자의 의도는 그런 안정감을 누리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괴로움은 멀어진다는 거다. 살아왔던 삶과 사람들과 세계로부터 갈 수록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지구를 떠난 우주선이 멀어져만 가는 지구를 바라 볼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가고자 하는 곳은 멀고도 멀고 어둡고 캄캄한 곳인데 익숙했고 함께 했던 세상은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작아진다.

그래서, 방향이 다를 뿐, 정서는 같아야 한다. 이 직업은 세상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종의 정서적 동질감을 유지하면서도, 자기 존재 스스로를 붕괴시키려는 유혹에서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내적인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지구로 부터 멀어져 가는 방향은 저마다 다르지만 멀어져 가면서 느끼는 소외와 두려움의 정서는 같을 수 밖에 없다. 방향에 있어서는 타인이요 정서에 있어서는 동일인이다. 이 직업의 사람으로서 갖는 유일한 정직성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좋은 차를 타던 낡은 승합차를 타던, 남루한 옷을 입던 명품을 걸치던, 가난하던 부유하던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요 그가 속한 지역과 공동체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영혼 중심에 모든 멀어지는 사람들과 정서가 공유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멀어짐의 쓰라림을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 까지 쓰니 밥이 다 되었다고 벨이 울린다. 배가 고프다. 센치멘탈한 상태에서 허기진 몸을 가진 연약한 존재를 느낀다. 이 직업군에서 일을 하지만, 나또한 나의 상담자에게 먹을 것을 얻으며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작은 겸손을 배운다. 

[상상] P.S. 있었다고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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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나랑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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