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집밖에서 택배기사님이 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전에는 초인종 소리가 띵동띵동 났었는데 고장난 후 고치질 않아서 볼 일이 있는 분들은 모두 문을 두들기거나 소리를 냅니다. 택배기사님은 물건을 전해주기도 하고, 집에서 보낼 택배 물건을 수거하기도 합니다. 택배기사님이 오면 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유가 되면 냉장고에 있는 차가운 바카스 하나를 건네드리기도 하죠. 더운 날이나 추운날이나 고생스럽게 물건을 배달해 주시는 분들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택배기사님들은 늘 대답이 한결같습니다. "제가 하는 일인데요 뭘...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분들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며 오히려 대접에 감사하다는 말씀하십니다. 나로서는 참 감사한 마음이 들지만 오히려 그분들의 말과 모습을 통해 "맡은 자가 하는 일" 이라는 당연한 태도를 배우게 됩니다.
제 통장에는 매월 10만원의 선교비가 들어옵니다. 오래 전에 알던 분들이 제가 시골교회로 왔다는 것을 알고는 보내 주시는데요, 어떤 분은 5천원 어떤 분은 10,000원 이렇게 십시일반 모아져 매월 10만원의 선교비가 생깁니다. 시골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교회들보다는 상황이 좋기에 공식적으로 선교비를 받는 교회는 없지만, 어려운데 고생한다며 이렇게 따로 선교비를 보내주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정말 사회의 낮은 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다른 목회자분들에게는 죄송한데, 어쨌든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기도와 도움 덕으로 지역에 있는 작은 교회들이 그 명맥을 이어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는 별도로 교회에서 교우들이 자체적으로 헌금하는 선교비가 1년에 약 80만원 정도 되는데 외부 지원과는 별도로 따로 선교할 수 있는 돈이 생긴 것이죠. 외부에서 보내주셔서 모아진 선교비는 일년이면 96만원이라는 나름 큰 돈이 됩니다. 하지만 보내주신 선교비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조용히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기때문이기도 하고, 보내주신 돈들을 시중의 돈의 가치보다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는 없더군요. 그래서 나름 의미있게 사용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지난 3년을 돌아보니 보내주신 마음만큼이나 이쁘고 아름답게 사용된 듯 해 나름 뿌듯합니다.
2013년에는 교회 전기공사를 하는데 가지고 있는 돈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좀 보탰습니다. 2014년에는 강원도 어디께에 불타버린 시골교회에 새롭게 건축을 하는데 보낼 수 있었고요, 2015년에는 또 다른 작은 시골교회에 선교비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모자란 것은 애초에 이웃을 위한 십일조로 따로 모아 놓은 것이 있었기에 그 돈을 섞어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선교비를 보낼 때면 조심스러운 것이 그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자칫 내가 무엇인가 돕는다는 입장으로 그들에게 비춰질까 조심하곤 합니다. 애초에 내 돈으로 드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뭘 하는 것도 아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주는 것이 아니라 건내드리는 것이기에 건네주는 사람으로서의 태도와 마음을 분명히 하는게 중요한 것이죠. 마치 택배기사가 물건을 잘 전달해주는데 성실한 태도를 갖는 것과 같은 태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맡겨준 것을 전달하는 삶. 이것이 나름 추구하는 삶인데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나름 성자코스프레 한답시고 버는 돈은 족족 다 써버렸는데 결혼하고 나니 어디까지 나와 가족을위해 써야 하는가가 늘 고민이 됩니다. 그나마 결혼하기 전에 그리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고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돌이켜 보면 가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제 자신의 신앙에만 몰두한 철없는 행동이 아니었나 부끄러워 집니다. (간혹 자다가도 생각나면 이불을 박차게 만드는 일들이죠)
맡겨진 것을 전달하는 삶은, 솔직히 기준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 항상 나보다 낮은 생활 수준으로 사는 분들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세한 가족들에게 기준을 맞춰 살기에는 생활과 사역에 지장이 좀 생기기도 하고, 아무튼 이게 좀 어렵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도 저와 생각이 비슷해서 절약하고 모은 돈이라도 우리께 아니라는 의식이 골수까지 박혀 있는지라 나름의 적잖은 해법은 보이긴 합니다.
문제는 공적인 영역에서 주어진 돈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것인가 하는건데요, 어느정도의 문화수준, 생활수준, 교육수준을 유지할 것인가가 관건인 듯 싶었습니다.
요즘은 아내도 자신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집 안에 책상도 몇 개 사고 아이 침대 매트도 갈아줬고 저도 아끼는 기타도 이쁘게 수리했고 책도 샀으니 그리고 일년에 한번은 1박2일이라도 여행을 가려고 하니 나름 우리 기준에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시회를 가려고 하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제 모습도 그러하고, 가난하고 청빈하게 살며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나눠주고 섬기는 그런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사는 삶에도 종종 풍경소리가 나듯이, 예배시간의 예배 시작 종이 울릴 때가 있습니다. 갖고 있는 것들을 모아 놓은 것들을 이웃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의 소리입니다. 가진게 별로 없을 때는 그 소리가 잘 안들리는데 뭐라도 가진게 생기면 꼭 그 소리가 납니다. 참 희한한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과 우리를을 위해 살다가 그런 종소리가 들리면 그때는 주님께서 내 삶에 맡긴 것을 찾으로 오셨다는 그 싸인으로 삼자는 것이죠.
최근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내나 나나 결정을 편하게 했습니다. 빠져나간 빈자리를 보면서 조금 염려하는 나의 민낯을 모습을 보면서 다시한번 '나도 똑같구나' 마음에 좀 더 겸허한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하여 나의 이런 마음과 자세들이 참으로 위선적이라는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나는 단지 좀 더 큰 만족감을 얻으려고 이렇게 한 것이지, 이것이 고매한 가치라서 그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좀 신비적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예수님의 인정을 바라고 버림으로써 얻는, 훗날의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진실함으로 나누고 섬기는 세상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맡겨진 것을 잘 전달하는 택배기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착한 택배 기사는 되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도 선한목자는 못되고 삯꾼목자이긴 하지만, 악한 삯꾼목자는 되지말자는 것이 지금의 진심입니다. 확실히, 내가 바라던 신앙의 이상적 모습으로 부터 점점 멀어저가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착한 택배기사는 되지 못하지만 불성실한 택배기사는 되지말자는 생각을 다시한 번 해봅니다. 아직 욕심이 많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 내 자신을 모두 내어주지도 못하고 마음도 위선적이지만, 맡겨주신 것들은 성실하게 배달하는 전달자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종교인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건 그의 삶이나 믿음있어 보이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를 불쌍히 여기는 "신의 은혜"때문일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겉과 속이 다른 내 삶에 그 은혜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하여 오늘도 내일도 내게 맡겨진 것들 잘 전달하는 성실함이 더 깊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