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짜증

그러니까 짜증이 문제입니다.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텐데 한번 그게 눈에 들어오거나 귀에 들어오면 그 다음 부터는 생겨나는 짜증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칠판에 분필로 삑삑 소리를 내듯이 머리 속과 마음 속을 긁어대며 신경쓰이게 만듭니다.

정서적인 거리감에서 오는 감정이 불안해지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특별한 행동들에 생겨나는 짜증도 문제였습니다. 꽤 오랜동안 느끼지 못하다가 이번 주에 찐하게 느껴버렸습니다. 예배는 시작되었는데 옆사람과 집안 얘기를 하염없이 한다든지, 찍찍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을 발로 긁는다든지 특별히 설교만 시작되면 계속 헛기침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수 십 년을 그렇게 예배했던 삶의 습관들이라 생각하기에 늘 '그런가보다'하는 마음으로 너털너털 넘어가곤 했습니다만, 이게 일단 눈이나 귀에 한 번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생기는 짜증은 막을 도리가 없더군요.

한번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 정서적인 균형이 무너지고, 한가지 정서로 가다듬었던 것이 흩어져 버립니다. 연기에 몰두해 대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관중석에서 껌을 짝짝 씹으며 다리로 바닥을 툭툭 치는게 눈과 귀에 들어왔다고나 할까요. 초점과 균형감이 한꺼번에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예배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생겨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밖에서 사람들과 만날때도 일어나곤 합니다. 내가 더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고, 뭔가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되어있다보니 작은 것에도 쉽게 흥분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예배든 생활이든 갑작스럽게 닥치는 짜증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건 짜증을 막는게 아니라, 생겨난 짜증을 최대한 짜증나지 않게 다루는 것이었죠. 내게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첫단계로, 짜증난 내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기, 둘째로, 욕심부리지 않고 준비한 기본만 하기, 세째로, 문제가 될 사람들은 만나지 말고 나혼자만의 기도와 휴식기를 갖기 였습니다. 첫째 둘째는 짜증난 상황에서 하는 것이었고, 세째는 짜증난 상황 후에 일상으로 돌아와서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내 자신을 격리하고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주는 준비도 더 많이 했던지라, 오히려 더 짜증이 나는 상황이 짜증이 나긴 했지만, 어쨌든 이 또한 내 자신이 겪어나가고 극복해야할 한 과정이라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을 내면 기대치가 높아져서 작은 것들에 더 신경이 쓰이고 짜증이 나게 되는 듯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무욕의 마음이 필요한 때 같습니다.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겸손하고 성실하게 준비할 것과 역시 이 일은 내 뜻과 준비만 가지고서는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더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좌충우돌 짜증만발의 한 주였지만 내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는 시간이었기에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봄 심방도 모두 마치고, 고난주간도 끝나고 4월이 되었습니다. 마당 한 켠 화단에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는 걸 보니 봄은 봄인가 봅니다. 어서 내 마음 속에도 향기로운 꽃의 싹들이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불안한 이 파도타듯 움직이는 감정들도 부드러운 봄흙처럼 푸근하게 풀어져 어느덧 향기롭고 보기 좋은 꽃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말대로 청소년기에 겪지 못한 사춘기를 지금 겪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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