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상상] 우울이라는 병

  우울이라는 병이 주는 독특함이 있다. 우울은 우울에 빠진 사람에게 “우울은 나의 적이자 유일하게 나를 알아주는 참된 나”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우울은 그에게 죽음과 함께 생명을 허락한다. 그는 우울의 세계 속에서 고립되고 분해되고 질척거리는 시간의 늪에 가라앉고 모래 흙속으로 묻혀간다. 하지만 죽음같은 우울은 그에게 “이 세계 속에서 나는 홀로 존귀하고 특별하다”는 생명력이고 역설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이 생명력은 살아남으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음에 방치함으로 얻는 것이기에 생성과 창조의 에로스적인 쾌감이 아니라 마치 자기를 죽이는 타나토스적인 쾌감에 가깝다.  

  일상에서의 모든 관계와 세계와의 단절에 깊은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면서 눈물 흘리지만, 우울함이 주는 독특한 죽음의 쾌감과 특별함은 우울에 걸린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우울을 찬양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바꾸어 버린다. 행복함으로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지만 불행함으로 세상의 주인공이 된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우울은 고립되고 단절된 혼자 만의 세계 속에서라도 자신의 의미를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 세상을 벗어난 과도기적 상태와 같다. 이 세상을 벗어나있기에 세상의 공간과 시간에 이질감을 느낀다. 모든 공간과 시간이 일렁이고 왜곡되고 출렁이며 점성이 짙게 느껴진다. 이질적인 세계 속에 빠져들었기에 감각은 녹아내리고 육체조차 그 감각에 따라 무너지고 힘을 잃게 된다. 마치 원시적인 고대의 세계로 흘러 들어가듯 모든 것들이 우울의 세계 속으로 녹아내린다. 흡사 죽음과 같은 잠의 상태가 지속된다. 

  하지만 그곳은 정상적인 사람이 있어야 할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정신과 육체의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는 세계의 끝이다. 사람이 갈 수 없는 하데스의 정원이요 강이다. 그렇기에 우울의 세계에 오래 있게 되면 몸도 마음도 녹아 내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균형을 잡고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저 세계로 녹아 들어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듯한 혹은 몸과 정신을 모두 포기하고 그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들도 생긴다. 이 세계 속에서 녹아들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 이들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영원한 잠과 같은 그 세계를 동경할지도 모른다. 

  우울이라는 질병은 단지 마음과 몸에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만이 아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다시금 보게되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특이하고 특별하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처절하다. 더하여 이 세계에서 존재의 끈과 이유를 놓쳐버리는 이들에게는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영원한 잠으로 가는 위험한 문이기도 하다. 그 이상한 세계에서 다시금 이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치료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금 이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갈 이유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든지 혹은 저 우울의 세계가 열어준 또 다른 참담한 세상으로 도피해버리는 그런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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