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종교] 보여지는 것과 감추인 것 사이

기독신앙의 윤리는 보여지는 것과 숨기는 것 사이에 위치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 16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장 1...4절)

마태복음 5장에서는 착한 일을 해서 마치 빛처럼 소금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라고 하지만 마태복음 6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라 하지 않는다. 선한 행동들이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일 가능성과 영향력에 대해 말한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구제"에 대해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한다. 적극적으로 숨기라는 의미다. 전자의 선행에대한 예화는 적극적으로 착한 일을 하는데 집중하되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반면에 후자는 구제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감추는데 주의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착한 행실에 주력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구제를 하거나 자신의 구제 활동을 자랑한다. 누구를 도와주거나 헌신하거나 기적적인 일들은 자주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 1절은 그런 우리들의 마음에 주의를 줍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하지말라는 거다.

유혹이 있다. 내가 하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말함으로 "나는 이렇게 신실하게 살고 있다"는 인정을 받고 싶고 자랑을 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알아주는 것이 좋고 그것이 종교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다. 더 겸손한 척 하면서 선행과 구제를 자랑한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게 합리화한다.

'이렇게 하는 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야. 착한일을 사람들이 알아야 더 헌신하고 더 착한일을 많이 하지 않겠어? 요즘은 PR의 시대아닌가. 좀 애매한게 있다손 치더라도 다 주님을 위해서야'.

심지어 내가 저지른 실수나 잘못까지도 말을 할 때는 그 속에 "나는 이렇게 나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야"라는 심리가 있고, "이렇게 내가 내 잘못을 말했으니까 너희들은 더 이상 이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굳이 얘기하려면 나의 정직함과 겸손함을 찬양해" 이런 저급한 마음도 담겨 있다.

아! 나는 얼마나 내 자신의 선행과 구제와 헌신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라는 명목아래 내 자랑과 인정을 받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는지 모른다. 심지어 나의 잘못까지 말하면서 말이다. 그 잘못 또한 나의 잘못을 가차없이 정직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 은근히 나의 중요한 잘못은 피해가며 적절하게 나를 포장했는지 모른다. 잘못을 시인하는 중에도 여전히 정직하지 못하다. 더욱이 구제를 자랑할 때 구제를 받은 사람은 얼마나 창피하고 힘들까하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도 않는다. .

요즘 내 자신을 돌아보니,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만남이 없다보니 존재감이 상실되어서인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누가 나를 알아주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점점 더 많아지는 듯 하다. 옛날에는 "나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고 싶지 않아. 주님만 기억되길 원해"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누가 나를 기억해주면 그게 그렇게 고맙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과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유혹에 종교적인 행동들을 말하고픈 유혹도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내 자신의 입술에 재갈을 씌우는 것이 갈수록 더욱 힘들어지기도 하면서 더욱 중요해진다. 마태복음의 5, 6장 말씀은 자기 자랑과 자기 인기를 추구하는 내 혼탁한 마음에 얼음같이 투명하고 차디찬 은혜를 준다. 선행에는 열심을 다해되 누군가를 구제하고 돕는 일은 숨기며 하라는 말씀이다. 올 해 자주 생각했던 개인적인 신조인 "잘못은 자랑하고 기적은 감추라" 는 말이 더 떠오른다. 실은 12월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잘못을 자랑하라"는 말도 "잘못을 인정하라"는 말로 바뀌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잘못을 겸허히 인정함에는 구구절절 변명이 필요없고 이야기가 필요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신앙의 윤리는 보여지는 것과 숨기려는 것 사이에 위치한다. 예수님은 자랑하는것과 인정받고 싶은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욕망조차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가르친다. 누가 알고 모르고는 누군가의 역할이고, 누가 알게 하고 모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내가 할 것은 좀 더 착한 일에 힘쓰고, 누군가를 몰래 돕는 거다.

이렇게 내 자신의 마음을 글로 남기면서도 또 하나의 욕망이 움틀댄다. 이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블로그에 남기면 누군가가 보겠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연출하려는 저급한 노력이다. 그래서 이런 솔직한 심정들은 모두가 볼 수 있는 블록그에도 실을 수 없고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픈할 수도 없다. (아마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천천히 다시금 나눌 수도 있겠지만). 다만 이곳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나의 밑바닥을 잘아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거친 모습을 냉정하게도 뜨겁게도 받아들이지도 내치지도 않으면서, 다만 한 사람의 삶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여 줄 수 있지 않나 하는 믿음이 있기에 이렇게 글을 남긴다.

물론 이런 생각조차도 여전히 내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픈 얄팍한 마음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첨언하면서, 적극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적극적으로 구제함을 숨기라는 이야기에 감춰진 사람의 욕망 아니 내 자신의 한심한 한 부분을 남긴다. 내게 감춰진 것들이다.

[정신승리] 일상에 의미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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