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성경] 관계 - 비판하지 말라

[성경] 관계 - 비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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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서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장 1-5절, 개역개정)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유명한 말입니다. 인용된 다른 구절 5절을 보니 비판의 대상이 "형제"입니다. 사회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나 공인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바로 내 옆에 있고 함께 일하는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말 그대로 "형제"이거나 "형제같이 가까운"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관계의 지혜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가까운 관계에서 주의해야 할 행동입니다. 내가 가까운 사람을 비판하면, 그 또한 나를 비판합니다. 비판하면 내가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좋은 상태로 유지되길 원한다면 비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성경의 뜻을 좀 더 들여다 보기 위해 표준새번역 성경을 펼쳐봤습니다. 단어와 문장의 뜻이 달라집니다. 개역개정성경에는 "비판"이라고 되었는데,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심판"이라 나옵니다.

1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2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2절, 표준새번역)

비판과 심판은 말의 무게가 다릅니다. 당연히 심판이라는 말이 더욱 무겁습니다. 더욱이 표준새번역은 "하나님의 심판"이라 설명합니다. 내가 형제를 비판하면 형제가 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비판한다고 합니다. 표준새번역의 의 단어로 하자면, "내가 형제를 심판하면 하나님이 그 심판으로 그대로 나를 심판한다"는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은 사람-사람 사이의 윤리적인 지침이나 삶의 지혜를 말하는 차원인데 반해서, 표준새번역은 사람-하나님 사이의 신앙적이고 종말에 이루어질 심판의 차원으로 발전합니다. 두 성경은 형제를 비판, 심판하는 것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공통점은 "사람과의 관계든 하나님과의 관계든 가까운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것이 내 자신에게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곧잘 잊어버리곤 합니다. 내가 가까운 누군가를 비판하면 그 또한 나를 비판한다는 사실을 까먹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비판은 정당하지만, 상대방의 비판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가까운 사이에서 하는 비판은 결국 내 자신에게도 돌아온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때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의견차이가 있습니다. 서로의 가치관과 기준이 달라서 이기도 하고, 일의 목적이 명확하게 공유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름이 아닌 틀림 때문에 곤란한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서로들 이 다름과 틀림을 여러가지 방면에서 생각하고 대화하면서 목적을 찾아가고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고 가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소모적인 얘기만 반복합니다. 보다 효율적이고 나은 점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틀린점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틀린 점만 얘기합니다. 결국 감정과 시간만 소모되고 돌아서서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들이 반복됩니다.

같이 일하고 가까운 사람의 가치관과 기준이 뭔가 조금 잘못됐음을 알았습니다.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 여기서 눈은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우리의 안목, 기준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눈에 티가 꼈으니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게 당연합니다. 그것을 봤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절을 보자면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보통 그것을 "비판"하거나 "심판"한다고 합니다. 보다 나은 방향으로 건설적으로 얘기하고 실현가능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비난으로 모든 것들이 끝나고 맙니다. 

상대방의 잘못과 부족함을 비난합니다. 비판은 단순히 그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가진 그 사람 자체를 비난하는 의미라 볼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으로 보자면, 사람의 작은 불완전함을 보고는 마치 내가 하나님인 듯 모든 것을 다 알고 완벽한 사람인 듯 심판하는 태도를 말합니다.이렇게 비난, 비판, 심판하는 태도로 상대방을 만난다면 일을 제대로 성사시킬 수도 없을 것이고, 형제관의 관계조차 더 악화될 것이 뻔합니다. 

가족끼리 얘기할 때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서로의 맘에 안드는 부분을 지적합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나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이 때 서로 겸손하게 웃으면서 "맞아 내가 그런 면이 있지"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서로 감정이 상하고 옛날 일이 나옵니다. 서로 가슴에 못박을 말들을 하곤 비난합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받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그런 비판과 심판을 하는 사람의 눈을 상대방에게서 돌려버립니다. 상대방을 보던 눈을 내 자신에게 향하게 합니다.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상대방 눈에 있는 작은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전봇대는 보지 못한다 합니다. 그런데 너무 말이 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리가 없습니다. 내 눈에 들보가 들어있을리가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 눈, 곧 내 안목과 내 기준이 많이 틀렸다는 의미입니다. 내 눈이 삐딱하고 내 기준이 한 없이 잘 못 된 것은 모른 채 형제의 작은 잘못만 힐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옛말에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모양세입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또 달리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눈 앞에 작은 물체를 대면 저 멀리 크게 있는 풍경들이 모두 가려집니다. 그와 같이 내 안에 있는 작지만 삐뚤어지고 잘못된 시각들은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가리고 뒤틀어지게 보게끔 만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눈에 작은 눈꼽만 껴도 앞에 뿌옇게 보이지 않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상대방의 티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몸소 그것을 교정하고 뽑아주겠다는 친절함마저 보입니다.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서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자기 눈도 시원찮고 문제가 많은데 다른 사람 눈을 고쳐주겠다고 합니다.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행여 상대방의 온전한 눈조차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정말 상대방을 바로 보고, 그의 눈에서 티를 빼기 위해서는 어찌해야겠습니까? 5절에 나오듯 내 눈에서 먼저 티를 빼야 합니다. 내 눈이 먼저 나은 다음에야 상대방을 바로 보고 그를 도울 수 있는 기회도 생기게 됩니다. 

성경은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내 눈과 내 마음의 기준과 가치관이 바로 서 있는지를 성찰하라 말합니다. 먼저 지켜봐야 할 것이 바로 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고치려는 노력보다는 내 자신을 고치려는 노력을 먼저하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도 못고쳐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안경점에 가서 안경을 맞춘 일이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눈검사를 합니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져서 대부분 기계가 알아서 측정해 줍니다. 그런데 안경기사님이 내 눈을 측정해주다가 잠시 머뭇거리는 겁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뒤에 있던 안경을 집어들고 안경을 씁니다. 기사님이 내 눈을 측정하려고 기계를 들여다보는데 잘 안보입니다. 기사님이 안경을 벗고 기계를 본 것이었죠.

다른 사람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 눈을 고쳐주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며 남을 비난하고 고치려고만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서 남의 잘못만 보려한다면 그는 분명 자기를 기만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또 자기 잘못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비난하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안과 겉이 다른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은 결국 그 자신도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게 될 거라 일러줍니다. 그리고 그런 비난과 판단이 도를 지나쳐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듯이 심각한 모습으로 드러난다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그 사람에게 임한다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사람은 보통 다른 사람에게는 혹독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중적인 잣대와 기준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면 문제가 됩니다. 자칫 비난과 심판의 수준까지 가게된다면 아무리 가까운 형제와 동역자라 할지라도 그 관계는 얼마 가지 못해 멀어지고 깨지게 됩니다. 어제의 동료와 형제가 오늘의 적이 되어 내가 날린 화살을 내게 날릴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지혜를 줍니다. 그 지혜를 다시 짧게 요약한다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까운 이를 비난하거나 심판하려 하지 마라.
늘 먼저 네 자신을 돌아봐라.
네 자신을 먼저 가다듬어라.
그 후에 돌이켜 형제를 축복하고 도움을 줘라."

형제와 함께 있고 여러 사람들과 일을 하다보면 내 부족함과 잘못이 많이 노출됩니다. 혹 이런 부족함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난이 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지적과 비난에 같이 화살을 날리거나 요란한 변명을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람들이 소중하고 그들과 함께 좋은 일들을 이루어 나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에게는 마태복음 7장이 가르쳐 준 지혜가 큰 도움이 됩니다. 내게는 사람들의 비난을 인정하는 깊은 겸손함과 내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려는 성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에대한 판단과 비난을 멈추고 내적인 눈을 떠 내 자신을 성찰하는 삶의 기술과 지혜, 이것이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일을 이뤄내야하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분명합니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웹툰 “생각많은 판다” - 비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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