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작은 화단의 풀과 꽃을 보며
교회 마당의 작은 화단을 두 주간 방치했다. 잦은 비에 갑작스레 자라난 잡초와 꽃들이 뒤섞여 버렸다. 낭패다. 나는 꽃과 잡초를 잘 구분 못한다. 아니 구분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다고 하는게 더 정확하다. 꽃이 있으면 좋지만 꽃이 피고 지는 것에는 그닥 큰 관심이 없다. 아주 가끔 마음을 매료시키는 색을 내뿜는 꽃 앞에는 잠시 눈길이 머물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온통 초록색 천지 풍경에 보라빛 붉고 노란 점들이 찍혀있는 것이 나름 괜찮다 생각하는 정도다. 내 눈에는 잡초나 꽃이나 비슷해 보이는데, 다만 잡초는 꽃이 잘 보이지 않게 핀다는게 꽃이라 불리는 것들과 다를 뿐이다. 그러니 꽃과 잡초가 저리 섞여서 자라도록 내버려 둔 것이 하등 이상할 것 없다.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교회 마당에 꽃을 심고 가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 마당과 교회에 애정을 갖고 섬기고 돌보는 것은 분명 자신들의 삶과 신앙에 도움이 된다. 물론 교회 운영과 목회에도 큰 도움이 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지만, 사람이든 일이든 어떤 것이라도 애정을 갖고 돌보며 함께하는 것이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자기 자신과 가족의 한계를 벗어나 교회를 가꾸고, 교회를 통해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 인생에 깊은 의미를 준다. 신앙 안에서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 갖게 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많은 문제가 있기도 하고 교우의 삶도 빡빡하다보니, 헌신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싫어하는 교우도 많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화단 가꾸는 일은 이곳의 교우라면 큰 힘 들이지 않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를 위해서 꽃을 심는가. 교회를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그런 의미로 교인이 화단을 가꾸는 것은 꽤나 권장할 만한 일이다.
“목사님한테 맡기면 안돼. 꽃이고 잡초고 다 잘라버리셔”. 라고 키득댄다. 맞는 말이다. 풀뽑으라 해서 뽑았더니 새로 심은 꽃이었다고 한다.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이제는 나한테 묻지도 않고 화단을 당신들 편한대로 구성한다. 이상적인 일이다. 내가 개척한 교회도 아니고 내가 나름 지원받는 패밀리가 있는 중대형 교회 목사도 아닌 까닭에, 목사의 말과 목회 방침에 모두가 아멘하고 큰소리로 말하지는 않았다. 좋게 말해서 그렇지 안좋게 말하면 엉겅퀴같은 마음들이었다.
사랑과 성실과 인내는 내가 배운 목회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목사는 교우를 사랑하고 성실히 대하고 참아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명령을 못하고 교인들 부담대는 말을 하질 않는다. 지도력을 갖고 이끄는 것이 목회적으로 필요하지만, 내게는 그런 담대한 능력도 없고, 부임한 후 오랜 동안 지도력을 발휘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변화를 위해 기도하지만 결국 사람들 가운데 납득할 만한 변화가 오지 않으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눈에 가라지와 엉겅퀴와 가시덤불같은 이들도 보이고 꽃과 열매같은 이들도 보였지만 그것들을 내가 치리할 수는 없었다. 치리는 사랑의 본을 충분히 보인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이요, 내게는 치리의 능력과 권위가 주어지지도 않았고, 내게는 무엇보다도 무엇이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지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꽃과 잡초를 구분하지 못하는 내 눈은 목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좋은 성도와 나쁜 성도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하는 성도는 있었지만 그것이 내 잘못때문인지 아니면 그 성도가 나빠서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판단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그렇게만 대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정죄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주님 앞에 기도하며 자책할 따름이었다. “내 사랑이 부족한 탓입니다. 사랑의 능력 주시옵소서”.
작은 화단에 씨앗을 심고 잡초도 뽑지만 모든 것들은 너무 빨리 자라나버려서 뒤섞여 버린다. 무엇이 꽃이고 잡초인지 알 수도 없고 서로들 엉켜있는 까닭에 잡초를 뽑다가 꽃도 뽑아버리게 된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과 극단적으로 방치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나로서는 그 종이에 그저 사랑과 성실과 인내라는 글자를 쓰려고 할 뿐이다.
“이번에는 겨울을 나는 꽃들도 심었어요. 매번 심는것보다 올해 본 것들을 내년에 또 보는 것도 좋아요”. 애정을 갖고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화단의 꽃을 보며 내년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고 내년을 위해 오늘 무엇을 심는 수고로움또한 어려운 일이다. 방치되었던 조금 넓은 화단은 교우들의 손으로 새롭게 채워져가고 있다. 그리고 내 작은 화단은 교인들이 심은 꽃과 내가 놔두고 있는 잡초들로 채워진다. 성경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다들 시간이 없다고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덧 교우들이 감리교 공과를 갖고 스스로들 하기 시작했다고 보고를 한다. 이상적이다. 내가 인도하면 프로그램이 되고 신경을 써야 하지만 스스로들 하면 신앙의 친교가 된다. 올 해는 이렇게 하고 내년에는 저렇게 해야겠다는 계획도 비춘다. 겨울을 나는 꽃을 심듯이 신앙과 교회에 대해서도 내일과 내년을 생각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교회라는 작은 화단을 두고 방치와 맡김 사이에서 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다. 그 화단 앞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이다. 화단을 가꾸는 공식을 가르쳐주는 세미나도 있지만 대개는 새로운 종자를 사갖고 돌아오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사람과 지역의 특색이 있듯이 화단마다 각자의 고난과 저마다의 희망이 있다. 화단을 맡겨주신 분은 화단을 섬기는 자로 나를 보내실 때 분명 당신만의 뜻이 있었을 것이다. 각자의 화단을 가꾸는 비법은 나를 보낸 분에게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믿는다. 사랑과 섬김. 주님께 맡기는 삶이 게으름과 방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하려는 노력을 늘 해야하고 더욱 주님을 닮는 사랑의 수고를 잃지 말아야 한다.
몇 년 전 일이다. “목사님.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그 소리에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엉겅퀴였고 가시덩쿨이었던 사람들이었는데 꽃처럼 말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주님의 화단이며 모두를 품고 사랑해야 한다 작정했지만 겉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내 속에서는 가라지와 꽃을 구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아니, 거의 모두가, 거의 항상 모두가 꽃으로 보인다. 지금의 나를 괴롭히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지 현재의 상황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단이 채워지고 꽃들이 심겨졌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우들의 삶에는 어느덧 은혜의 모습들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꽃과 잡초를 구분하지 않듯이, 교우들도 내 속에서 꽃과 잡초를 구분하지 않는 듯 하다. 엉겅퀴같던 모습들은 서로를 지탱해주는 끈으로 바뀌었고 거칠게 자라나는 잡초의 생명력은 그 말그대로 끈기있게 교회라는 화단을 지키는 신앙의 일부가되었다.
그러고보니 주님의 말씀이 맞다. 씨앗을 뿌릴 때는 언제 자라나 생각하지만 밤과 낮이 지나면 싹을 티우고 열매를 맺는다 하셨다. 농부는 그것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지 못하지만 땅이 씨앗이 그렇게 스스로 자란다고 하신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지만 가라지 뽑다가 알곡까지 상할까싶으니 추수때까지 가라지를 뽑지 말라하신다. 딱 내 얘기다. 전에는 가라지를 뽑다가 얽혀있는 알곡을 뽑는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가라지와 알곡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섣불리 뽑다가 앞으로 귀한 알곡이 될 이삭들을 다 뽑아버리기 십상이다. 내게 좋다고 알곡이고 내게 나쁘다고 가라지가 아니다. 나의 적이 목회와 주님의 적이 되는 것도 아니요 나의 편이 목회와 주님의 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하든 사랑의 법을 떠나지 않고 고귀함을 잃지않는 언행이 중요하다.
다시 화단을 보니 좀 지저분하다. 그래 눈에 좀 많이 띄는 엉겅퀴 잡초는 뽑는게 맞는 것 같다. 다른 풀과 꽃들을 다 억눌러 버려 못쓰게 만든다. 사람은 이렇게 못하지만 풀은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내 자신에게는 그리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남겨진 화단은 내 자신뿐인 듯 하다. 나 자신을 조금 더 가꾸고 채우고 열매를 맺는 삶과 목회를 더욱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지나 온 기억에 지금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기는 싫다. 오늘 보다는 조금 더 나은 내일과 내년을 생각하며 새로운 씨앗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해야 할 때다. 내 속에도 받아들이고 사랑해줘야 할 나만의 잡초도 꽤 있다. 교인을 사랑하려고 했지만 내 자신에게는 너무 심한 자책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삶을 살기도 했다. 아마, “나는 이렇게 내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니 나는 그래도 착한 죄인이야”라고 생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 약한 모습까지도 이제는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엉겅퀴라 생각했던 이들과 사람들이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을 보며, 나같이 부족한 종도 언젠가는 주님이 칭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소망을 배운다. 말하지 못하는 화단이 나를 가르치고, 흔들리는 풀과 꽃들이 내게 사랑과 변화를 알려준다. 화단을 보며 하나님이 함께하신 은혜의 시간들을, 나 자신을 돌아본다. 다시보니 잡초도 이쁘지만 꽃이 이쁘긴 하다. 다들 잘 자라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