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욕망은 피어나지 못한 채 희망 혹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씨앗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졌다. 욕망은 신앙의 이름아래 철저하게 해부되고 거세되었지만 비전과 희망이라는 신앙의 이름으로 바뀌어 마음의 화분에 심겨졌다. 화분에는 “미래의 어느날”이라는 작은 이름표를 붙였다.
모두에게 그렇듯이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은 씨앗을 움트게 했지만 꽃으로 피어나진 못했다. 그는 가능성이란 기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낮아짐과 겸손은 신앙 안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미래였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가능성의 미래를 상실한 사람에게 살 길은 오늘의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승리 뿐이다. 신앙의 십자가는 더 이상 희망도 소망도 기쁨도 구원이 아니요 피할 수 없는 자기 변명으로 전락한다. 얼굴과 입술에 가득한 기쁨과 소망의 진실은 마음 안에 있는 후회와 우울이다.
한 때는 청소부가 될 지언정 낮아짐의 삶을 기쁨으로 살겠노라고 열정을 내던 젊은이었다. 자신은 청소부도 될 수 있다는 낮아짐의 소망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그 맘 속에는 청소부가 아닌 또 다른 장미빛 미래 조차 받아들일 순종의 마음이 있었다. 젊음의 특권은 시간과 가능성이지만 그는 그런 특권을 시간의 혜택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실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 더이상의 장미빛은 없고 떨어진 장미 떨기들을 치워야 하는 청소부의 고단한 삶이 되어서야 그는 자신의 낮아짐이 십자가의 선택이 아니라, 그저 삶의 실패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젊은 성자는 바라고 바라던 낮아짐의 청소부가 되었지만, 더이상 과거의 기쁨과 열정과 소망은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렇게 철없었던 자신의 젊음을 후회하고 나이들어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세계의 불공평함에 불평을 한다.
하지만 이제 청소부의 자리조차 잃을까 두려워 십자가와 관계된 것들은 아예 모른 척하고 살기로 작정했다. 사람들 앞에서 여전히 자신의 삶은 거룩한 선택의 낮아짐으로 이렇게 청소부가 된 것이라며 스스로를 성자처럼 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고도 자랑스럽게 빗자루질을 하던 그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거리에 어둠이 내리면 그 어둠의 무게만큼이나 실패한 자신의 삶을 씁쓸히 씹으며 자신의 작은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방문을 열며 어두운 방을 쳐다보던 그는, 젊은 날 그렇게 원했던 골방과도 같던 수도자의 방을 마치 언젠가 돌아갈 무덤의 관같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