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종교] 두 마음 두 생각

 

간밤에 더위에 지치고, 밖에서 밤새도록 떠드는 이상한 얘들 소리에 지쳐 몇 시간 못잤다. 아침에 쾡한 눈으로 일어나면서 생각했다. “간장 게장 맘껏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정오가 지나서 갑작스레 저녁식사 약속이 잡혔다.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약속한 집에 들어가니 밥상이 펼쳐졌다. 밥상 위에 올려진 건 “간장게장”. 먹고 싶다고 아침에 속으로 중얼거렸던 그 간장게장이다. 순간 안도현 시인의 간장게장이라는 시가 생각났지만, 눈물을 머금고 그자리에서 밥 두 공기와 간장게장 두마리를 꿀꺽 해치웠다. 밥을 먹고 나자 정말 맛있는 복숭아가 후식으로 나왔다. 옆에 앉은 아이가 복숭아 몇조각을 삼키더니 말한다. "아까 복숭아 먹고 싶다고 했는데". 먹고 싶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진 저녁이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저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신앙간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것을 간증이라고 한다면 나 또한 이런 일들은 참 많다. 학비가 없었는데 기도했더니 어디서 장학금을 준다고 갑자기 연락이 온다거나, 진로 문제때문에 기도했는데 갑자기 길이 열리거나, 공사 문제로 돈이 필요했는데 누가 준다거나 하는 기타등등의 그런 일들이 있긴 했다. 

나는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하나님이 내 맘을 알고 나를 사랑해서 그리 했다고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내 생각의 한 귀퉁이에서는 '하나님이 이런 기적을 베푸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건 일종의 우연일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내 마음에는 내가 생각한 것들과 부딛치는 다른 것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 개인적인 사정들을 일일이 챙기는 분도 아닐 뿐더라, 저 옆에서 굶어가는 아이들이나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서 나만 먹이는 그런 하나님은 더더욱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특별히 무엇인가를 주는 하나님은 양심적으로 마음에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것은 우연일수도 있어'라고 생각하면 내 양심에 피할 길이 생긴다. 더욱이 분명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우연이라는 것도 있을 듯 해서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신학적으로는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도와 섭리에서 벗어나는 우연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학적인 입장에서의 자유의지 논쟁은 상당히 재미있다.  현대과학에서 다루는 자유의지 논쟁은 마치 중세 자유의지 논쟁의 새로운 업데이트 버전같이 느껴진다. 일단 근거와 정보는 기억이 안나고 스쳐간 책들이 남겨준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 

나는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채우십니다"라는 고백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고백은 내 마음에서 맴돌 뿐 내 입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아직 이 세계에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앙으로 간증하고 고백한다고 하지만 자칫 다른 이들에게 상처가 되는 생각없는 고백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내 삶에 필요한 돈을 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피같은 돈이다. 그걸 단지 하나님이 주셨다고 끝내버리는 건 마음이 편치 않다. 베푼 사람의 희생과 사랑이 가려지는 듯 해서다. 

하지만, 과학문명시대에 살면서 그 혜택이란 혜택은 다 누리면서 믿음과 신앙은 기적적인 구약성경의 한 이야기에 의존해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정신이 아직도 출애굽하지 못한 채 구약성경 앞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다양한 삶의 지표가 있는데 영적인 선민의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아직 예루살렘을 못벗어난 사람들도 있다.  더하여서 하나님은 내 농사를 잘 되게 하라고 다른 사람들 피해주며 태풍을 부르시거나,  내 옆집 사람을 혼내키려고 담장을 넘어뜨리는 분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에게만 음식을 주는 분은 아니다. 모든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나 혹은 악마의 영향으로 보는 사람들은 선과 악의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의 정황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놓치곤 한다.  그들은 세상을 흑과 백으로 보며 기도하거나 혹은 흑과 백으로 행동할 뿐이다. 과거에 내가 자주 그랬고 지금도 종종 그런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우실 거라고 믿는다. 정말 이율배반적이다. 확신과 불신이, 염려와 평안이, 두 마음과 두 생각이 내 속에 함께 한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이런 고백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두가지 마음과 생각이 내 속에서 좌뇌와 우뇌처럼 함께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때는 이쪽이 앞서고 어느 때는 저쪽이 앞서지만 결코 어느 하나만 가는 법이 없다. 

새벽에 기도할 때는 아픈 허리를 붙잡고 낫기를 구하지만 기도 자리에서 일어나면 기도한 것은 까맣게 잊고 허리운동을 하고 근력을 키우려고 노력한다. 내게 있어 기독신앙은 초월적이지만 신앙행동과 삶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맞는 거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살 때 혹 기적적인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받을 자격이 없는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세상과 신에게 겸손히 감사하며 사회와 이웃에게 그 이익을 나누면 될 일이다. 

기적적인 간장게장과 복숭아였지만 그 음식을 만들고 준비한 아주머니와 아저씨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야 할 것 같아서 속으로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다음 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감사는 계속 드릴께요".

이런 생각들 자체가 무신론자 입장에서 볼 때면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망상증 환자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게는 적어도 신앙과 합리라는 두가지 마음과 두가지 생각이 마치 프로펠러의 날개처럼 서로를 쫓아가며 나를 앞으로 이끌고 있다. 신앙만이었다면 혹은 합리적인 생각만이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그냥 살고만 있었을 것이다.  

전에는 이런 정신구조를 갖고 있는 내가 잘 납득이 되지 않았고 두가지 마음 사이에서 곤고해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지 이런 내가 싫지 않다. 전에는 내 자신이 신앙과 사회 공동체에서 이방인같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와 이 사회 속에서 조금은 쓸모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뒤틀리고 모호하고 앞뒤가 안맞는 인간을 그대로 바라봐주고 용납한 시선이라면 이제는 다른 이들을 조금은 더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이런 두 마음 속에서도 혹시나 지금 내게 기적적인 간증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새로운 삶의 소망과 열정이 솟아난다는 것이고, 아직도 나를 사랑해주고 따라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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