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그렸던 지구 그림이 생각나. 우주로 뿌리를 내리고 지구가 열매가 되는 우주 나무였지. 사람들은 그 나무의 열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어. 이른바 거꾸로 자라는 나무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 다른 나라의 신화와 종교를 보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똑같이 쓰여있더라는 거야. World Tree 또는 Universe Tree라고 부르더군. 지금 읽고 있는 바가바드기타에도 그런 부분이 있고, 인디언 신화에도 있네. 성경에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 있고 말이야.
어릴 때도 종교의 위인들에 대한 책을 보긴 했지만 우주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읽은 기억이 없는데, 그때 우주 나무를 그리고 생각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 분석심리학자인 융의 자서전을 보니 융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고 하네. 융은 이걸 집단 무의식이라고 보고 원형(Archetype)이라고 생각했나 봐. 모든 사람들의 의식 저 밑에 흐르는 큰 종족이나 인류 전체의 의식 말이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각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하곤 해. 종교인들은 원형 의식이 초월적인 신 때문에 생기는 거라 생각할 테고, 어떤 이들은 아주 오래전 인류의 공통된 기억이라고 하기도 하겠고, 아니면 인간이 그냥 상상으로 만들어낸 게 우연히 맞았다거나 어릴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듣고 본 것들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라 설명하는 이들도 있을 듯 해.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런 비슷한 것을 경험하곤 한다는 거야.
이런 원형은 인간 의식의 밑바닥에 흐르는데 그 에너지와 형태가 종잡을 수 없어서 우리는 그것들을 외면하고 살지. 그것을 마주하면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정체성과 존재감을 알게 해 주고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것들이야.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노크를 하지. Knock Knock Who’s there? 이런 Knock 소리에 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종교와 예술인 듯 싶어. 종교와 예술은 그런 원초성을 안전한 방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지. 그래서 우리는 종교와 예술을 통해 그 무엇인가의 열정과 힘을 느끼고 위로를 받고 희망을 발견하는 듯 해. 아...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런 원초성을 종교적인 제의를 통해서 조절하고 드러낸다는 얘기를 융이 했던 것 같아.
다시 세계 나무로 돌아와서, 세계 나무는 우리의 시각을 거꾸로 만들어 버려. 지구에서 생명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저 우주 - 이른바 물질로서의 우주가 아닌 우리의 한계를 초월한 저 우주 바다의 끝에서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거야. 밑도 끝도 없이 굉장히 종교적이지. 그 끝에서 푸른 지구가 열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생겨났어. 그래서 지구는 우주의 계절에 영향을 받고 철따라 변화를 해. 우주의 계절 변화에 맞춰서 말이야.
종교적인 이들은 우주의 변화에 지구와 인간의 운명조차 결정된다고 생각하겠지. 어차피 종교적이지만 그 속에서 좀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지구와 인간은 우주의 물리적으로 연관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거야. 어찌 되었건 지구에 사는 작은 우리가 겪는 일들은 저 커다란 우주 나무에 비하면 지극히 작다는 거야. 비록 때로 괴롭고 짜증 나는 일들이 있지만 우리는 커다란 나무의 잎사귀 같은 존재야. 너무 작고 작아. 하지만 소중하고 위대해. 저 커다란 우주에 연결이 되어있으니까 말이야. 작지만 위대한 것이 바로 우리지.
몇 주 전부터 화분에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어. 집에다 그런 걸 키우는 아주머니들이 참 이상해 보였는데 지금은 내가 그러고 있네. 옆의 화분에는 상추도 있고 방울토마토도 자라네. 희한하게 빨리 자라. 정말 신기해. 식물을 키우고 보고 즐거워하다니, 이전에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야. 그래 우리는 그렇게 심긴 식물들처럼 자라고 변화될 거야.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리고 또 자라나고 말이야. 때로 바람이 불어와도 더 튼튼해지고 더 뿌리 깊게 자라날 거야. 신화에서 본 세계 나무도 그랬어. 큰 바람이 불어도 잘 자라나지. 우리 맘 속에는 누구나 다 그런 우주 나무가 심겨 있다고 생각해. 비록 작은 듯 하지만, 비록 바람에 흔들리는 듯 하지만 결국은 푸르르고 결국은 향기로운 꽃과 열매를 맺는 그런 커다란 우주 나무가 있어.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쓰니 글의 끝이 어딘지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꾸준히 써 나가야 돼. 영국 드라마 셜록을 보니까 처음에 와트슨에게 조언을 하는 정신과 의사가 얘기를 하던군 “블로그에 글은 계속 써요? 쓰는 것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땐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가 돼. 나는 계속 써나 가야 돼. 속에 있는 것들을 토해 내야 돼. 아니… 오히려 깊은 침묵 속에 내 속을 담가놔야 해. 모든 것을 비우도록 써 내려가든지, 아니면 모든 것이 익어버리도록 침묵 속으로 깊이 잠기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다시 예전의 일들로 돌아가야 할 듯 싶어. 내가 정한 길도 아니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어딘가 길이 닿아있겠지. 세상이 궁금하고 사람들이 궁금한 것은 사실이야. 갈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세상. 나는 아직도 어릴 때 그 동네처럼 아직도 내 삶의 작은 동네에서 살고 있어. 하지만 내가 만나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이 사람들일 거야. 그리고 나와 이 곳 사람들은 그 어디 그 어느 누구들에게는 또 다른 미지의 사람 미지의 곳 일 테니까 말이야.
그래 나는 깊은 침묵의 바다로 잠수할 거야. 그리고 다시 예전의 일들로 돌아가야 할 듯 싶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지만 아무도 옆에 없게 되는 그곳으로 가야 할 듯 싶어. 이제 조만간 그렇게 될 것 같아. 혼자만의 여행은 그만하고 이제 다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지. 그저 함께. 나는 깊은 침묵의 바다로 내려갈 거야. 그리고 깊은 시간이 지나면 나도 언젠가는 저 화분에 심긴 씨앗처럼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고 열매를 맺을 거야. 커다란 우주 나무처럼 그렇게 깊고 넓게 자라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