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유대교화 헬레니즘. 마틴헹엘
마틴헹엘의 “유대교와 헬레니즘”을 읽고 짧게 정리했다. 이른바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라 일컬어지는 시대를 설명하는데 예수 시대의 유대교가 어떠한 상황이었는지를 그려보게 만든다. 내용은 “그리스 로마의 문화 곧 헬레니즘이 유대사회와 유대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하는 것이다. 간단히 “예수 시대의 유대는 이미 헬라화가 된 사회였고, 유대교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헬레니즘화된 유대교였다” 정도로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결론을 성경해석에 적용하면 예수님의 비유나 설화의 바탕이 되는 유대에 대한 밑그림을 조금 더 성실하게 그려나갈 수 있는데, 목가적이거나 도시적인 이분법 혹은 전통 유대교와 세속적인 로마사회의 갈등구조로만 보는 것을 넘어서 좀 더 세밀한 관찰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요약은 책을 읽고나서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라 단순하다. 더 자세한 내용들은 책에 많이 기록되었는데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읽어 볼 만하다. 책값은 권당 28,000원 총 세 권이고 독서시간은 총12시간 정도 잡으면 될 것 같다. 읽을 때는 책의 뒷부분에 있는 요약을 먼저 읽고 다시 앞의 내용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아래는 각 권을 읽고 나서 생각나는대로 정리한 내용이다.
제1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교와 헬레니즘 문명의 만남 (팔레스타인의 비종교적 세력으로서의 헬레니즘 문명)
알렉산더의 점령 이전 페니키아인들의 지배 때부터 팔레스타인은 이미 외부의 영향에 노출되었고 군사, 조세, 경제 전반에 걸친 헬라화가 진행되었다. 헬라화에 대한 수용, 거부, 갈등의 시기가 있었고 헬라문화에 대한 호감과 반감의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지만,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은 이미 헬라화된 유대였다.
제2부 헬레니즘의 문화적 위력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미친 영향 (헬레니즘적 유대교로서의 팔레스타인 유대교)
예수 시대의 팔레스틴과 유대교는 이미 헬라화된 유대교이자 헬라화된 팔레스틴이었다. 지식인층과 권력가들에게는 그리스어가 보편적이었고 일반인에게도 그리스어는 친숙했음이 틀림없다. 그리스와 로마의 권세를 얻기 원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헬레니즘이 유대사회와 유대교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대한 반발로, 오히려 토라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운동이 있었다. 성전과 연관된 서기관 그룹과 랍비가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또한 교육의 방법론과 문화에 있어서는 헬라적인 것들을 받아들였다.
제3부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와 헬레니즘적 시대정신의 만남과 대결 (헬레니즘에 대한 수용과 저항 사이의 팔레스타인 유대교)
헬레니즘은 유대교의 신학적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잠언, 전도서, 시편 등의 지혜문학과 종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묵시문학이 발전했다. 사회적으로는 유대사회와 유대교의 사상에 헬레니즘을 적극 도입하려는 이들과 달리 마카베오 봉기와 같이 헬레화에 반대하는 그룹과 사건들이 있었다. 헬라화에 대한 반응은 다양해졌고 헬라화의 그늘에서는 종말론적인 묵시사상이 출현하며 세상과 인간의 구원에대한 신앙이 깊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에세네파에 이르러 구체화 되었다.
제4부 유대교의 그리스적 해석과 예루살렘의 그리스어 사용 유대인의 개혁시도 (개혁시도의 좌절, 유대교적 반작용의 결과)
친 헬라적이었던 토비야 가문 이후로 유대교를 헬라화하려는 시도가 많아졌고 셀로우코스 왕조를 등에 업고 힘을 행사하려는 상황까지 갔지만 반발은 거셌다. 오히려 율법 중심과 보수적인 토라해석을 고수하면서, 비평적이고 창의적인 토라해석을 거부하는 바리사이 그룹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로마사회는 초기 유대교를 이성적인 개념을 추구하는 이방의 철학자로 생각하며 호감을 가졌으나, 유일신신앙과 율법을 강조하는 모습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심의 배타적인 신학에 오히려 경계하는 긴장관계로 바뀌어 갔다.
**독서이후 요약 : 책을 다 읽고 난 후 머리 속에 인상적으로 남은 내용.
예수 시대의 유대교는 이미 헬라화된 유대교였다. 사상, 교육방법, 정치적 입장에서 그러했다. 반면 그 내용에 있어서 헬라화의 포용과 저항으로 분명해진, 세계철학으로서의 지혜문학과 묵시문학, 토라에 대한 강조와 보수적인 토라해석을 특징으로 하는 다양한 신앙그룹이 생겨났다. 역사적으로는 친헬라파인 토비야 가문과 반헬라적인 하시딤, 하스몬왕가, 그리고 셀로우코스왕조의 힘을 입고 더 완전한 헬라화를 추구하는 것에 반대하며 봉기한 마카베오 등이 헬라화의 수용과 거부를 드러내는 정치적인 그룹이라 할 수 있다.
바리사이는 헬라화에 대한 저항에서 그 성격이 분명해졌고 보수적인 유대신앙의 선봉 그룹이자 반헬라적인 성향을 가졌고, 이러한 배타적인 신관과 토라의 강조와 유대민족과 예루살렘 중심주의는 당시 로마사회에 반감을 갖게 했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라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추구함으로 로마사회와 융화되었다는 점도 간과하면 안된다. 융화도 갈등도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예수의 복음은 전우주적이면서도 인간중심적이었고, 토라의 해석에 있어서 자유로웠고, 유대민족과 예루살렘을 넘어선 신개념과, 언약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을 넘어선 전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언약을 강조하면서 보편적인 윤리를 제시했다. 예수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터 출발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랬지만 그의 복음은 그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반유대적이면서도 친헬라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