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설교문]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설교문]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주일 예배 설교문
제목 :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본문 : 누가복음 1장 26-56절
일시 : 2024년 12월 15일 주일


서로 간의 기쁨으로 인사하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중요하죠. 그리고 또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도대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실까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어요. 성탄 얘기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라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을 잘 드러내고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복음 1장 말씀을 보면서 성탄의 얘기를 함께 나눠보고자 하는데요. 예수님의 모습과 또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이야기는 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신비이고 비밀이에요. 표현이 잘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마음의 비밀은 나만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그 신비는 내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그릇이 하나님을 다 담기에는 그렇게 대단한 그릇이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질그릇 같은 우리의 귀중한 보배를 가졌기 때문에, 작은 유리 같은 우리 속에 커다란 빛을 가졌기 때문에 밖으로 그 빛을, 밖으로 그 향기를, 밖으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죠. 그래서 그 드러냄은 세상 사람들 또한 고개를 끄덕일 만한 덕스러움이 되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믿는 자의 삶 가운데 밖으로 드러내는 그 무엇을 통해서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이것이 희망이다, 이것이 아름다움이다, 사람은 이래야 된다”라는 끄덕임이 생긴다는 것입니ㄷ.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을 만난 내적인 신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지에 대한 그 귀한 고백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내적인 신비는 세상이 알 수 없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우리의 모습은 세상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믿는 자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넓고도 밝고 크게 인류와 세상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길 원하는가 또한 우리들이 어떤 마음과 지향점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는가 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신앙은 내 속에서 좁고 깊게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 신앙의 힘이 있습니다. 저도 살면서 많은 의문과 물음표와 어려움이 있지만 이 길을 누가 보더라도 끝까지 갈 수가 있는 까닭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저에게 어떻게 살라, 무엇을 위해 살라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상황에도 의심할 수 없는,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릴 수 없는 그 무엇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ㄷ. 이것은 말로 설명하고 또 이해하기 하기 어려운 하나님과의 내적인 신비스러운 만남입니다. 또 얘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만의 소중한 경험들이기 때문에 나만의 소중한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만 간직하고 싶은 평생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내적인 신비와 그 경험을 넘어서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안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충만할 때 힘이 있는 것이고 또 우리를 세상 밖으로 이끄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살아갈 때 세상적으로도 덕스러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은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수태고지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수태고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의 몸을 통해서 아이를 잉태케 하십니다. 보통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죠.

예전에 구봉서라는 코미디언ㅇ 있었습니다. 독실한 장로님이셨습니다. 아주 유명한 얘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예전에 온누리 교회 담임이셨는데 그 전에 연예인 교회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연예인들 모아놓고 목회를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이제 구봉서 장로님이 함께 성경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주 젊은 한 연예인이 목사님과 성경 공부를 하는데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 사람이 이렇게 말을 했다 합니다. “저는 도저히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거 말고 다른 얘기해 주세요.” 당연한 의심이겠죠. 근데 그 얘기를 들은 구봉서 장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신랑 요셉도 믿었는데 니가 뭔데 안 믿어?”라고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죠. 그 남편도 믿고 그렇게 잘 감싸줬는데 니가 뭔데 그런 얘기를 하냐라는 구봉서 코미디언다운 그리고 신앙의 진득한 믿음이 담겨 있는 그런 고백이었죠.

사실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반응이 있습니다. 기독교인 중에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라고 말했을 때 한국에 있는 성도님들은 대부분 열에 아홉이 다 손을 듭니다. “믿는다”. 한 분은 “아직 믿음이 없어서요”라고 대답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미국에 있는 성도들만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에게 물어보면 동정녀 탄생을 믿느냐고 했을 때, 열의 여섯이 믿고 나머지 넷은 ‘믿기지 않아요라고 하지만 받아들여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믿겨지지는 않지만 받아들여요. 이게 좀 다른 의미거든요.

그리고 또 그러면 그들에게 ‘왜 믿겨지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니까 “믿겨지지 않는데 어떻게 그걸 억지로 믿습니까?”라고 대답을 하고, ‘그러면 예수님 안 믿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을 때 “그거은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 날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이지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이 나에게 없다고 해서 나는 내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이들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 생각도 좀 어느 면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비기독교인 중에서는 동정녀 탄생 때문에 내가 기독교를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냐 내가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못 믿겠다. 이제 그런 분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이해할 만한 태도입니다.

이 부분은 마리아도 같았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네가 아이를 갖겠다라고 말하니 마리아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3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요.” ‘남자를 알다’는 뜻은 이제 이스라엘의 히브리적 표현이에요. 남자를 알다는 건 남자와 관계를 맺다라는 그런 뜻이에요. 나는 남자를 전혀 모르는 그냥 여인인데 어떻게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의심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능력이 너를 덮으실 것이라 말합니다. 마치 흙에서 아담을 만드시듯이 흙 같은 여인의 몸에서 새로운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신다는 그런 말씀이죠. 흥미롭게도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아다마’라고 하는데, 이 흙 ‘아다마’에서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이 아다마라는 말은 흙과 땅을 말하는 히브리어인데 그 속성이 여성이에요. 흙과 땅을 여성적으로 감성으로 받아들이는 뜻이 그 안에 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이제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나오시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옛날 흙에서 사람을 만드신 창조의 하나님이 흙 같은 작은 비천한 여인의 몸에서 하나님이 나오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죠. 가장 연약한 곳에서 가장 강한 분이 나오십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분이 나오십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나십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것과 낮은 것과 사람을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선포이고 선언이자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인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결국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면서 그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합니다. 38절에 마리아는 가브리엘을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대답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주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다.” 주의 여종이오니 나는 종일 뿐이니 당신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 뜻대로 되길 원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많은 신자들의 본이 되고 복된 마리아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잉태한 마리아에게 친족인 엘리사벳이 축복합니다. 45절 말씀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인에게 복이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신비함 가운데 두려움과 떨림으로 만나기도 하고요. 요셉처럼 꿈에서 보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경험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분들도 있고요. 또 그런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 위대하고 우리의 영혼 깊게 떨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하는 이들 가운데 온전히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생명의 말씀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품고 살아갈 때 마치 그 옛날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듯 우리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온전히 그 말씀을 품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말이죠. 이는 주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씻으시고 새로운 생명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된 것이죠.

흙과 같은 여자의 사람의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신 하나님은 나같이 부족한 자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것이 성탄 이야기, 마리아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하는 이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가장 작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 구원받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나라는 사람을 경험한 이들은요.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이 내적인 신비를 벗어나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과 삶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나라는 사람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고백합니다. 47, 4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고백한 것이죠. 하지만 마리아는 거기서 신앙의 고백을 멈추지 않습니다.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51절에서 53절에 보듯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를 치시고 비천하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그리고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찬양하며 기도합니다. 우리와 교회가 마리아가 고백하듯이 세상에 희망되시고 구원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살아갈 때 세상 또한 교회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나와 교회가 세상에 힘 있고 교만하고 부유한 자만을 귀히 여기고 쫓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희망과 소망의 힘을 잃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다스림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느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난 2주간 우리는 너무나도 큰 시련의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국가 지도자와 국민을 섬겨야 할 지도자들이 자신의 사욕을 위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헛된 교만과 폭력을 목도하며 분노하며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 뿌려진 빛들은 더 강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남겨주시고 보존케 하시는 이성과 희망과 자유와 소망의 빛은 더욱더 컸습니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사랑에 공의에 더욱 갈급해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를 애쓰고 있습니다. 교회에 젊은 층이 없다고 우리는 많이 애타하며 한국 기독교가 많은 사람이 모여서 부흥을 위해서 광장에 모였던 것이 한두 달이 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젊은이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공의를, 자유를 외칩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가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잠잠히 돌아봐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교회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 밖에서도 계시고 교회 밖에서도 역사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나보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고 세상 속에서 빛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목회하다 보면 그런 것 같아요. 내가 기도하고 내가 계획하고 또 내 스스로 한계를 지으면서 ‘안 돼 해도 어려울거야’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람인지라 계획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무작정 살아갈 수는 없거든요. 그러다 보면 되는 가능성보다는 안 되는 것들이 더 많아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나보다 교회보다 크셨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활동하셨고, 내가 느낄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먼저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교회를 넘어서 세상에서 활동하시고 세상에서 빛을 발하시는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저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점을 치는 다른 종교를 가진 동방의 박사들을 부르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케 하시고 헤롯의 폭정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아기 예수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원수와 같던 이집트로 피난케 하셔서 그곳에서 목숨을 보존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생각과 신념과 문화와 종교를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마리아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49절에서 50절 말씀에 이렇게 말합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노도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54절 55절에서는 이제 그 나라를 도우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ㅎ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연약한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기억하시고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땅에 흘린 피를 기억하는 하나님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피를, 인류를 위해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그리고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기까지 순전한 믿음으로 그 땅을 살다 간 순교자들의 피를 기억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많은 희생의 피가 맺혀 있습니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서 피 흘린 선교사님들과 독립투사들, 우상숭배를 강요하던 일제의 항거함으로 끌려가 순교하신 수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들의 피가 있습니다. 공산군의 잔인한 침략에 맞서서 이 땅을 지키다 돌아가신 수 많은 호국선열의 피가 이 땅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날을 살리기 위해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린 노동자들의 희생이 이 흙에 배어 있습니다. 독재의 폭거를 몸으로 막다 죽어간 피들이 이 땅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희생의 피를 기억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또한 이 희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이 땅을 지키는 이들에게 당연히 감사해야 됩니다. 이 감사를 잃어버릴 때 기독교인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조금은 감정의 한 부분이 잘려나간 기계와 같은 사람들로 보이게 될 것입니ㄷ.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위해 살다 간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할 때, 오히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사랑을 섬기고 사랑하고 전도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삶에서 이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고백하고 순종한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옷자락을 하나님의 구원의 손에 한 부분을 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성탄 트리가 이쁘게 반짝입니다. 하나만 반짝이면 그렇게 이쁘진 않을 거예요. 여기 있는 불 하나가 저 잘났듯이 ‘나는 밝으니 나 혼자 밝으면 돼’라고 말하더라도 예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작은 불빛들이 여러 개 모여서 반짝이면 그제서야 비로소 성탄 트리도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때로는 내가 꺼져 있는 때도 있지만, 내가 다 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이가 빛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연약하다 할지라도 같이 빛나면 더욱더 아름다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빛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성탄의 얘기는 어둠 세상 가운데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죠. 그 빛을 이 마음에 품은 사람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라 믿습니다. 그 빛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세상 속에서도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늘 마음과 입과 내 몸에 새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세상 사람에게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하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절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문] 희망을 이룰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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