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 1 (누가복음 16장 1-8절)
누가복음 16장 1-8절은 복음서에서 가장 난해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주인이 등장하는데, 자신의 고용인 중 한 명이 부정직하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벌어진 청지기의 행동 때문에 주인이 오히려 청지기를 칭찬한다는 내용입니다. 비유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지만, 독자나 청중, 특히 서구인들에게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청지기의 부정직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 비유가 전하려는 진정한 메시지인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은혜를 놓치기 쉽습니다.
먼저 주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비유에서 묘사된 주인은 부유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청지기를 고용할 만큼 충분한 재산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합니다. 그는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며, 농사를 짓기 위해 그의 땅을 빌리거나 대여하는 소작농들이 있습니다. 주인은 이들로부터 돈이나 작물 형태로 소작료를 받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사업 관리자로서, 비록 로마와 유대의 생활상은 다르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사회적 지위는 비슷합니다. 청지기는 단순히 회계사나 장부 관리인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 사업 수단을 개발하고, 대여 계약서의 비용을 조절하며, 자산을 조회하고, 가축을 사고팔며, 노예를 사거나 고용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청지기가 주인에게 부정직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흥미롭게도 비유에는 청지기가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부정직하게 행동했다거나, 그들이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알고 있었다는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청지기의 평판에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그 원인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그 부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어, 상황을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를 남깁니다.
비유 속에서 주인이 청지기의 부정행위에 대해 별다른 징계나 조사를 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띕니다. 이는 청지기가 과연 실제로 나쁜 짓을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비유의 내용만 놓고 보면 청지기의 잘못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누군가가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주인에게 고발했다는 언급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정황이 어떠했는지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청지기가 사실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게다가 주인이 청지기의 해명을 들어보거나 사실관계를 철저히 밝히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청지기의 비리가 분명했다면 주인으로서는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고 마땅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만 청지기에게 사직을 요구했을 뿐, 다른 징계 조치는 취하지 않았던 것이죠.
이 모든 정황들을 고려해 볼 때, 청지기가 진정 부정을 저지른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근거 없는 소문이나 오해의 희생양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청지기가 억울한 상황에서도 슬기롭게 위기를 모면하고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이 비유에 담긴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 줍니다.
비유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 역시 언급된 부분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대면했을 때, 그를 처벌하거나 감옥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꾸중조차 하지 않았죠. 주인은 단순히 청지기에게 일을 그만두고 회계를 정리하라고 지시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회계장부를 가져오라(τὸν λόγον τῆς οἰκονομίας), 네가 더 이상 청지기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청지기에게 일종의 유예 기간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청지기가 주인의 자비를 엿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에게 청지기의 잘못을 고발한 사람들의 평가에 따르면,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불의하게 행동한 죄인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이며, 타락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청지기는 앞으로의 생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합니다. 그는 육체 노동을 선택하지 않고, 근육보다는 머리를 사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청지기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생계 수단을 확보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가 속한 마을 공동체 내에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중동 지역의 공동체 내 관계에 대한 인식은 개인주의에 익숙한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중동 사람들은 우리가 독립성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처럼,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 유지에 큰 힘을 쏟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자 공동체에 속한 존재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지어진 것이 아니라, 감정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용서와 포용을 실천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한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는 매우 소중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비유에서 청지기는 실직 후 누군가의 집에 머물거나 일시적인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들과 함께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목적은 누군가의 청지기가 되어 계속 일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지기는 고민의 시작과 결론에서 돈과 직업의 문제를 떠나, 공동체에 소속되어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많은 이들이 직업과 돈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지만, 진정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당시 농촌 마을에는 공공건물이나 법원이 없었기에, 중요한 사업 거래는 대개 마을 광장이나 도시 성문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거래에는 반드시 증인이 필요했죠.
반면 토지 대여나 담보 거래와 같은 사적 계약은 땅 주인이나 임대인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화 '대부(The Godfather)'에서 사람들이 사업 거래를 위해 대부의 저택으로 모이는 장면처럼 말이죠. 청지기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향후 사업 거래에서 누군가의 청지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지혜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려 한 것이죠. 그러나 청지기는 빚 자체를 없애지는 않습니다. 사기 혐의로 고발당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는 채무자들에게 직접 빚의 액수를 수정하게 합니다. 채무자들은 청지기의 해임 사실을 모른 채, 주인이 빚 감면을 승인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신속히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기뻐하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주인이 빚을 대폭 줄여 주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관대함을 칭송하기 시작했고, 작은 마을에서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몇 시간 만에 온 동네 사람들이 주인의 선행에 감탄하고 있었죠.
이제 주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채무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상황을 설명하고, 빚 탕감을 취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좋아하던 사람들이 분노하며 주인의 평판에 먹칠을 할 수도 있었죠. 다른 하나는 청지기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빚 탕감에 따른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재정적 손해를 보더라도 공동체 내 지위를 지키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열린 결말이라 주인의 최종 선택을 알 수 없지만,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을 오히려 칭찬했다는 점에서 후자를 택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자비만이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청지기 자신의 행위가 아닌, 주인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보여줍니다. 주인이 여전히 그를 처벌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청지기의 구원은 오직 주인의 은혜에 달려 있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지위와 생계, 구원 등 청지기의 모든 것이 주인의 긍휼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저 자신을 돌아보면, 종종 불의한 청지기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 불성실하고 자격 없는 자로 여겨질 때도 있었죠. 그러나 주님은 항상 새로운 기회를 주셨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깨달음을 얻고 행동할 힘을 주셨습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늘 물질보다 사람을 택하고 용서와 베풂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주님은 제 연약함을 아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제가 오늘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주님의 은혜와 용서 덕분입니다.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으로 인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처럼 우리 모두는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정직하게 행동할 때도 있죠. 그럴 때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비유 속 청지기는 나쁜 평판을 듣게 됩니다. 과연 그가 정말 악행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더 이상 그 공동체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처지라는 점이죠. 선택지라곤 궂은 육체노동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마저도 청지기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죠.
그런데 주인은 청지기에게 새로운 기회를 줍니다. 청지기는 지혜롭게 행동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깁니다. 주인 역시 그를 현명한 사람이라 평가하게 됩니다. 청지기의 과거가 어떠했든, 그는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와 동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청지기는 여전히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 살아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주인에 의해 청지기직에 복직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전혀 다른 일에 도전했을 수도 있겠죠. 어떤 경우든 그는 주인 및 공동체 구성원들과 더욱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탕자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열린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탕자와 그의 형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형은 아우를 위한 잔치에 참여했을까요? 동생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진정 깨우쳤을까요? 불의한 청지기에게는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합니다.
이처럼 비유를 미완으로 남겨 두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적인 화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청중들로 하여금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하고, 나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스스로에게 묻게 만듭니다. 비유의 열린 결말은 듣는 이들에게 깊은 통찰을 선사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의 오래된 사본들에는 무덤 앞에 선 여인들이 놀라 벌벌 떠는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죠.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비유 이야기는 명확한 교훈을 담고 있지만 끝이 없습니다. 그 결말은 말씀을 듣는 이들의 삶 속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등장인물이 되어, 주님이 주신 메시지를 자신만의 이야기로 써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이 그러했듯, 예수님의 비유 또한 열린 결말을 통해 말씀의 씨앗이 우리 삶의 밭에 뿌려지기를 원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각자 처한 자리에서 청지기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주님의 뜻을 새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직 주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께 드릴 찬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우리의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구원의 은혜를 얼마나 깊이 알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우리 모두 불의한 죄인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질렀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새 삶의 기회를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죠. 청지기는 주인을 신뢰했고, 주인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또한 우리를 신뢰할 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자격 없는 죄인일지라도 주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품어 주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복음 앞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며 주님 앞에 나아가길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과 용서의 팔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확신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웃을 향해서도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타인을 정죄하거나 심판하려 들지 말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은 죗값을 내가 대신 짊어질 순 없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품어주려는 마음만은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 받은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실천하는 삶이 요구됩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정직하게 살아가되, 율법의 잣대에 매이기보다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죠. 때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청지기처럼 일희일비하지 않고 지혜롭게 행동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잊지 맙시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애썼습니다. 우리도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물질과 성공을 좇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일깨워 줍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긍휼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분투가 때로는 부족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