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신화와 끝없는족보 (디모데전서 1장 4절) _ 원본
이 글은 http://woojoosoo.com/writings/2025/1/2/-1-4 (AI로 정리한 글)의 원본 버전이다.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쓸데없는 토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3-7절, 새번역성경)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는데 에베소 교회에서 무엇을 조심하며 목회해야 하는 가를 권면하며, 교회 내에 잘못된 가르침이 있음을 알려주며 주의를 준다. 바울은 "다른 교리"와 더불어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를 주목한다.
"신화"는 당대의 그리스로마신화와 유대 성경 밖의 신화적 이야기들을 말하고, "끝없는 족보" 는 성경의 족보를 말한다. 당시에 바울의 입장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을 다룬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는 다른, 다른 교리와 교훈을 가르치는 이들이 있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들을 주의하고 목회적인 질서를 잘 잡으라고 권면한다.
당시 로마는 수많은 신화가 있었지만 당대 로마의 철학자들 또한 신화를 비평적으로 받아들이며 해석하곤 했다. 신화 속에 있는 비도덕적인 내용들이 신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거였다. 그렇기에 신화는 철학적인 의미와 유비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신화 속에 있는 부도덕한 부분과 이성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은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었다.
당시 유대교 또한 이러한 영향아래 있었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신화처럼 받아들이고 절대시하면서 생겨나는 문제들로 고민하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있는 얘기로서 해석하곤 했다. 물론 유대교에서는 성경의 이야기를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영역에 있어서 더 큰 자유와 실용적인 면을 선택했다. 윤리에 바탕을 둔 합리적 이성적 해석은 당대의 유대교를 로마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그런 철학적인 시대 정신 아래에서 교회 안에는 세상의 신화와 성경의 이야기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상의 신화와 성경 밖의 이야기들에 집착했는데 자신의 잘못된 교훈과 부도덕함을 정당화 하는데 사용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변론과 말싸움만 일으킬 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족보에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다. 성경의 족보는 자신의 뿌리가 특별함을 증명해주고, 세상 사람이 악한 뿌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의 족보를 끊임없이 파고들고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었지만 그들의 지식과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고 사랑의 삶도 아니었다.
기존의 교인 중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잘못된 교훈과 논쟁하는 잘못을 범했다.(6절) 잘못된 교훈과 논쟁하기를 좋아했던 이들은 교회 안에서 율법의 교사 노릇을 했다. 자신을 말씀과 지혜의 지식을 가진 교사로 생각한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들은 실상은 자기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고 주장한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율법은 분명한 도덕적 기준과 방향성을 갖고 있었고, 건전한 교훈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에 맞는 것이어야 했다. 잘못된 교훈과 논쟁하면서 자신을 율법의 교사로 자처한 이들은 실은 율법의 뜻도 모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윤리인 사랑에서 떠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과 신앙을 가르치는 기준으로서 복음을 제시한다(11절). 성경과 세상을 해석하는 해석에 복음을 해석의 기준으로 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경륜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해석하고 집중시킨 바울 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지식과 신화는 많은 해석과 다양성을 주며 삶과 생각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복음은 중요하다. 교회의 해석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자리여야 한다. 다른 곳에서도 좋고 아름답고 그럴듯한 해석이 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가장 약하고 비참한 십자가에서 당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셨다. 인간의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한 지점이 바로 십자가다. 기독교 복음은 바로 십자가에서 시작하고 끝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바울 신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자 완성이었고, 하나님의 경륜의 씨앗이자 열매였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세상을 향한 겸손과 호기심으로 가득차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헛된 신화와 족보에 천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는다. 교회의 리더라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라면 지적인 배움과 호기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대한 더 깊고 예리한 고백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 고귀한 지식은 세상에 없는 우리 안에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지식을 깊이 간직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다. 이 지식은 복음의 지식이요, 다만 지식으로 끝남이 아닌 사랑으로 나타나도 드러내는 생명의 말씀이다. 자신의 지적인 쾌락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삼는 세상의 지식과는 다른,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드러내는 생명의 지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