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쏘세지가 싫어요

매주 토요일이면 사무실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분이 있습니다. 이씨!

어색한 노가다 복장의 어눌한 느낌의 나이 많은 남자가 고개를 빼곰 내밀면 사무실 직원들은 입구를 쳐다봅니다. 그러면 나는 서랍을 꾸적꾸적 뒤적이며 돈 몇 천원을 찾아냅니다. 그리고는 이씨와 함께 걸어나가죠. 노숙자들과 도움을 청하는 분들에게 현금을 드리면 밥을 사먹기 보다는 대부분 술을 마셔버리기에 가능한 직접 밥을 사드려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함께 식당에 가서 밥을 사드리는 것이죠.

이씨가 사무실로 매주 찾아 온지도 벌써 몇 달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사는 동네가 노숙자들이 많은지라 종종 사무실로 도움을 바라고 찾아오는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을 돌려보내는 역할은 늘 제가 맡곤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돌려보내기만 하다보니 내 자신의 신념과도 위배되는 것 같고 양심에도 많이 거리낌이 생겨서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자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씨를 만나게 된 것이죠. 이씨는 어눌했고 말도 떠듬떠듬 횡설수설 했습니다. 허름한 차림에 낡은 안전화와 츄리닝바지에 모자를 눌러쓴 것이 노숙자와 노가다 일용직 중간쯤 되는 행색이었습니다. 나는 이씨를 사무실에서 가까이 있는 노숙자에게 무료로 국수를 주는 곳으로 안내하려 했지만, 이씨는 그 곳에서 이유없이 몇번이나 거절당했다며 아이마냥 투정부리듯이 가기 싫어했습니다. 결국 내가 몇 천원에 떡라면을 사주는 것으로 그렇게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씨와 얘기 중에 그의 사정을 조금씩 듣게 되었습니다. 다 자란 청년같은 자식이 있는데 집에서 빈둥빈둥 논다고 말을 하기도 하고, 무료 급식소는 자존심 상해서 가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결국 나는 조금 욱하는 마음에 호기를 부려 말했습니다. 

“다음 부터는 다른 분들 어렵게 하지 마시고, 저를 찾으세요. 식사 한끼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후로 매 주 이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만남 속에서 내 속에서 무엇인가 뒤틀려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또는 금요일 마다 나를 찾아오는 이씨에게 밥을 사주면서 나는 일종의 선행에 대한 우월감과 쾌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분명 시작은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는데 계속된 과정에서 내 자신이 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된 것이죠. '나는 저 사람보다 낫고 행복하니 내가 도움을 주고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껏해야 한 주일에 돈 5-6천원 정도의 수고로 내 자신의 인격과 삶을 일종의 거룩한 수도자인것마냥 치장했습니다.  더 안 좋은 것은 그러한 상황이 슬슬 싫증이 나고 귀챦아지기 시작했다는 거죠. 선해보이는 행동에 동기와 행동이 꼭 일치하지 않을 수 있고, 처음과 나중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행동은 변함이 없지만, 동기가 달라질 수 있음도 봤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빼꼼 찾아온 이씨를 보며 살짝 화도 치밀어 올랐습니다. 계속 변함이 없는 이씨의 모습에 그리고 이중적인 내 모습에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좀 흥분된 마음으로 이씨와 함께 걸어갔습니다. 불과 200여미터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과 햇빛이 내게 어떤 영향을 준 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 뭔가 스물스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리적 거리는 200미터였지만, 내게는 안드로메다까지 가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옆에서 걷고 있는 이씨를 보며 뜨문뜨문 얘기하며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뭐지?'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함께한다는 이 고민이 불과 어제 밤 내가 했던 생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불과 14시간전에 그런 생각을 했고 그것을 글로 정리도 했습니다.

"어떤 (다스리려는) 위대한 사람 앞에 가면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반면 (함께하는 사람) 어떤 사람 앞에 가면 내 마음은 더욱 자라날 희망으로 채워집니다. 마음의 경계가 없어지고 창조적이 됩니다. 함께하는 것은 같은 땅에서 발을 디디고 같은 것을 보려하고 같은 것을 들으려하는 것에 있어요. 그러다 보면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겠죠. 사람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그 같은 것을요. 그 때는 정말 맘으로도 함께하게되는거죠. 누구와 함께한다고 꼭 그들과 같아질 필요는 없어요. 같아질 수도 없고요. 그런 시도를 해봤지만 잘 안되더라구요. 결국은 다른 것을 알지만 서로가 사람임을 알고 사랑이 필요함을 알기에 같이 있는거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든지 다가설 때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고, 아무것 아닌것 같지만 결국 모든 것을 하는 것, “함께 한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예요."(14간전 끄적인 글)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함께함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인데 이제는 그와 비슷하지만 반대의 입장이 되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씨와 함께 길을 걸으며 식당으로 향하는데, 이씨가 말합니다.

"오늘은 빵을 먹고 싶어요"

지난 번에 빵집에 가서 빵을 먹었는데 그냥 밥보다 라면보다 그게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속으로 ‘밥이 나을 텐데…’ 생각하며 뭐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왕이면 그의 맘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리하자 했습니다. 함께 빵집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보다가 야채와 햄이 많이 들어있는 피자빵을 권했습니다. 아무래도 식사대용이니 그냥 빵보다는 영양면에서 조금 낫겠다 싶었던 거죠. 그런데 이씨는 조금 다른 크림빵을 고르더니 피자빵보다 크림빵을 먹겠다고 합니다. 나는 영양을 고려해서 피자빵을 권했지만, 이씨는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유인 즉슨 그 안에 들어있는 쏘세지가 싫다는 것이죠. 

"쏘.세.지.가. 싫.어.요…. " 

또 한번 속에서 무엇인가 확 치밀었지만, 이씨가 원하는 빵을 사주었습니다. 이씨 손에 우유와 함께 빵을 들려주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향했고 이씨는 늘 그렇듯이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는 반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사무실에서 나올 때는 두사람이 함께 했지만, 돌아갈 때는 나 혼자 길을 걸었습니다. 내리 쬐는 햇살을 받고,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함을 느끼며 나름 생각하면서 터벅터벅 길을 걷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가족들이 생각났고 내가 걸어왔던 삶이 떠올랐습니다. 부유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크게 고생하지 않았고 대학까지 졸업하고 대학원도 졸업해서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력은 되지 않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마음도 생겼고 돈 몇푼이지만 돕고 함께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 내가 걸어 왔던 길…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돌이켜 보니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누군가로 부터 받은 것이었고, 도움의 손길로 주어진 것입니다. 내 위에 내리 쬐는 햇살 처럼, 피부에 내리는 따사로움 처럼, 귀밑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람처럼 모두 내게 값없이, 가족과 주위 분들의 희생으로 내게 주어진 선물과 같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내게 ‘주어진 선물을 내가 이룬 나의 가치'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씨보다 나았던 것은 단지 주어진 것들이 많았던 것 뿐. 우리는 같은 선상에서 공정하게 경주해서 자신의 삶을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내가 더 유리한 조건에서 출발했고 더 유리한 상황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이씨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나아 보이는 것들 또한 벌거벗은 이씨와 나 사이에서는 그 어떤 인간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구분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씨에게 선행을 하고 돕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자랑이 될 수도 없는 것이었고 또 나의 불편함이 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씨와 나는 어떤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함께 할 시간이 되었고 한 장소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잠시 함께 있었을 뿐입니다. 잠시라도 함께 있는다는 것.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있는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죠. 내가 이씨에게 밥을 사주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이씨와 나 사이에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밥은 이씨에게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와 나 사이에 중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에게” 도움을 주면 되는 것이지만, “그와 나”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함께하는 것” 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그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사람이고, 그 또한 나와 마찬가지 사람입니다. 나만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그 또한 내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고민하게 해주었고, 내 포장된 미덕이 얼마나 속물근성이었나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는 여느 노숙자들처럼 세상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난 노숙자는 대개가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속에서 그런 순진무구함을 가질 수 있음이 더 큰 미덕이 아닌가 생각하며 속으로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어려운 이웃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숙제가 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무엇보다도 한평생 청소 노동자인 어머니의 삶을 보며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었고, 대학교를 거치며, 그리고 사회를 둘러보며 성찰된 것입니다. 오늘은 그러한 삶의 발걸음에 대한 하나의 마음가짐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늘 그럴 수 없다 하더라도 함께 하는 것이 처음 출발이며 그것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돌이켜 보면 내 삶에 큰 힘을 주었던 이들은 늘 함께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면 그가 필요한 것을 그의 눈과 귀와 마음에 서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사람으로서 인정한다면 적어도 그 도움의 순간 만큼은 함께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임을 알려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한 인간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20XX0209

[일상] 들려오는 말

[상상] 그녀의 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