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일상]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완전히 빠져 나온 지는 불과 몇 년이 되었다. 나약한 내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삶의 여러가지 일들로 깊은 고통과 무력감과 죄책감, 우울감에 허덕이며 힘들게 살아가던 모습이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소망이 그쳐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던 그 시간을 인내하게 하고 소망의 끈을 놓치 않게 했던 것은 주님과 시집이었다. 주님은 신비적으로 내게 감동과 위로를 주며 나의 밑바닥 아래서 나를 지탱하며 나의 속을 아시는 분이었다. 나를 아는 이가 있음이 삶에 생명이었다. 그리고 시집 몇 권.

삼십대의 나는 시집을 읽을 시간도 없었고, 시라는 것이 마음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마음에 닿는 시 몇 개를 읽고 또 읽는 것이 전부였다. 사십이 되어 시를 읽기 시작했다. 세상의 책들이 재미가 없고 무의미해지고 사람들이 은혜롭다 말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는 현실감이 없었고 성경은 소망만이 아니라 죄책감을 함께 줬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이들이 쓴 글자와 책에 무감각해질 때에야 중학교시절 이후 쓰지 않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글을 보고 긴 시를 읽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을 까닭인지 서점에 펼쳐진 시집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만난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시집은 알 수 없는 이름과 제목들로 가득하다. 펼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암호문과 같다. 제목을 보고 펼치면 예상한 것을 넘지 못하는 설교문과는 다르다. 미스테리, 신비가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신비신학이 좋고, 이야기가 숨겨진 고전회화가 좋고, 철학적인 개념으로 뒤틀린 현대 미술도 좋아한다.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에는 감각하지 못한다. 수 많은 시집은 시집 수만큼이나 다른 세계이고, 각각의 언어는 나의 모국어가 아닌 저마다의 언어다. 알지 못한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처음 본 세계이지만, 마치 그 세계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느껴지는 세계는 거부할 수 없으리만치 몰입한다.

종이에 쓰여진 것들이 내가 쓴 것인지 아니면 이 사람이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겹쳐짐에 잠시의 현기증이 난다. 그리고 시는 내가 감각하면서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못내 뒤로 던져냈던 내 세계와 세상을 손바닥만한 종이 위에 구현한다. 잊고 싶고 잊어버렸던 나와 세계의 진실이다. 이것은 위로 - 아니 위로라고 말하기는 뭐한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말이 필요하다 - 아니, '나는 혼자가 아니다.' , '내가 이렇구나' 하는 마음을 들게하는 그 무엇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제목 만큼이나 그 안의 세계도 같다. 슬픔이 있고 십오초같은 짧은 순간들이 나온다. 긴 시간은 짧게 압축되고 짧은 시간은 긴 여운을 남긴다. 슬프고 뒤틀린 자신을 한 발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지켜본다. 시는 내 기억을 소환한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겪었고 알만한 무너짐들을 일깨운다. 어렵지 않은 말로 섬세한 우울질을 그려내는 것이 두텁게 물감을 덧대며 붓질한 오래된 유화와도 같다.

살면서 또 이와같은 시집을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새로운 시집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시집은 계속 읽을 것 같다. 어려운 때를 견디게 해 준 시집이, 이제는 오늘의 나를 얕지 않게 만들어 준다. 승리하고 성공하고 부유함에 이르는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슬픔과 슬픔의 세계는 나의 인생 후반의 정체성이자 타인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었다. 해결되지 못한 감정은 사람을 안으로 상하게 만든다. 기도와 시는 감정을 정화시켜준다. 얽힌 생각의 실들을 잠잠하고 단단한 줄이 되게 엮게 한다.

요즘도 종종 이 시집을 펼쳐 들고 읽고 생각한다. 조심히 봤지만 이곳저곳에 끄적인 흔적이 있고 어느새 너덜너덜해져버렸다. 마치 성경책과 비슷하다. 그러니, 어떨 때는 그런 생각도 든다. 신비의 주님께서는 내게 시를 통해 위로하시고 삶을 보는 눈을 하나 열어주신 것은 아닌가 싶다. 다윗의 수금으로 사울의 악신이 떠나갔던 일이 있으니, 시인의 시로 마음의 슬픔이 위로받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떤 시집을 좋아하고 어떤 시를 읽을까. 알 수 없다. 그다지 관심도 없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게 하고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준다. 나는 그리 넓은 세계를 경영할 정치인은 못된다. 다소 이기적이지만, 내게 맡겨진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작고 깊은 것들. 작은 종이 위에 적힌 작은 글자들로도 나는 주님의 신비를 느끼며, 세상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글로도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다. 신비한 한 손으로 장구한 역사 속에서 성경을 써 주시고, 창조의 영감이 서린 한손으로는 짧은 인생 속에서 깊고 영구한 슬픔을 보는 시인을 통해 시집을 주셨다.


오늘 펼쳐진 종이의 한 면을 보면서 하루를 감사함으로 마무리한다.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기에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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