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종교] 아홉살 아이와 종교

하루는 아이가 반 아이들 얘기를 하면서 무심결에 말한다. 
"아빠 걔는 하나님 잘 믿어"
내가 대답한다. "왜... 그렇게 생각해? 다른 얘들 위해 어려운 것도 하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해?"
아이가 다시 말한다.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하나님 잘 믿는지는 모르겠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인 형식과 종교적인 삶을 구분하고 있었다.

며칠전이었나 종교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엄마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이에게 묻는다.

"성현아... 너는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걸 믿니?"

"아니." 아이가 짧게 대답한다.

엄마는 살짝 당황했지만, 부드럽게 호기심에 차서 다시 묻는다. 
"그럼 너는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고 인도하신다는 거 안믿어?"

"음...." 
왠지 엄마가 조금 심각해지니 아이도 뭔가 대답을 잘못했나 싶어 뒤늦게 다시 생각을 한다. 
"그게... 뭐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엄마는 살짝 당황. 
"그럼 너 하나님이 계시다고 안믿는거니?"

아이는 .. "..."

이 때 내가 말한다. 
"그러니까, 안믿는 건 아니고 믿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하나님이 막 보호하고 인도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지?. 어쨌든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말야. 그런 의미 아냐?"

아이가 멋적게 웃으며 말한다. "맞아. 그런거야. 안보이니까 있는지 없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거야. 자기가 노력하며 사는게 중요한거야"

내가 말한다. "내 말이... "

아이는 이제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사람들 생각에는 부처님과 불교,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같은 과학자들도 있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에게는 종교적인 어떤 교육을 특별히 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다른 부모들은 어릴 때 부터 기도훈련 말씀 외우기 등등 여러가지를 하기도 하지만 나는 게으른 탓도 있고 또 여러 이유 때문에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단지 식사 때 감사 기도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종교 교육의 다다. 아빠가 살아가고 하는 일들이 종교적인 것들인데 아이에게까지 더 종교적인 스트레스를 주기 싫어서이다. 어찌보면 아이하고는 다른 종교나 신화, 동화나 과학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듯 하다. 노력의 중요성, 함께 하는 재미, 인생의 즐거움, 우주와 생물의 신비, 신화와 영웅들, 리더쉽과 정치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즐겁다. 종종 아이가 성경에 있는 것들도 물어 오곤 하지만 그 또한 아이에게는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들중 하나이지 특별히 종교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아닌 듯 하다.

오늘은 눈이 많이 왔는데 하루 종일 눈을 치우지 않다가 아이가 오고 난 후 밤이 되어서야 나가서 눈을 치웠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가려니 아이도 같이 옷을 따라 입는다. 너는 왜 옷을 입냐고 하니, 그냥 아빠하고 함께 나가려고 입는다고 한다. 난 그냥 산책하고 눈쓸려고 나간다고 하니, 아이도 함께 산책하고 옆에 있겠다고 한다. 결국 이것 저것 챙겨입고 마당으로 나가서 비를 챙겨들고 눈을 쓸어댔다. 아이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이곳 저곳 눈 위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눈을 다 쓸고 나서 눈덮인 뒷동산에 올라갔다. 아이도 함께 언덕을 올랐다. 어둔 밤이이지만 들판이고 산이고 하얀 눈이 쌓인 것이 보였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지만 듬성 듬성 별들이 빛나는 것도 보였다. 오늘따라 쓰레기를 태우는 집도 없어서인지 공기가 하도 맑고 차가워서 피부를 투명하게 뚫고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폐속 까지 마음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랄까.

언덕을 내려오면서 아이가 말한다. "아빠. 그냥 이렇게 아빠하고 함께 있는게 좋아". 가슴이 뭉클해지고 아이를 잡은 손에 힘이 저절로 가 아이 손을 더 꽉 잡게 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성장하고 성숙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것대로 하기를 원하곤 한다. 더욱이 종교적으로 열성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더하다. 그런것들이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필요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고 혹 의식적으로 필요한 종교적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와의 경험을 통한 함께함과 홀로됨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하는 기쁨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경험한다. 거기서 사랑과 용납을 배우고 용기와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아이는 또 홀로 있게 된다. 학교에서 길에서 자기 방에서,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9살의 삶에서 홀로됨을 경험한다. 아이는 그 홀로됨의 경험 속에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고 채워가는 법을 배워간다. 그 홀로됨의 승패는 부모와의 함께함에 연결되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요즘들어 부쩍 아이가 커간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도 표정도 태도도 그렇다. 변하지 않고 성장이 멈춰있는 것은 오히려 부모인 나다. 아이의 성장에 맞춰 나도 더 유연해지고 아이에게 더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9살의 아이는 비록 부모가 생각하는 형태의 신앙적인 대답을 하지는 않지만 그 아이만의 신앙과 삶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경험들은 일생 동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의 자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9살의 아이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그런 아홉살의 삶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대개 문제는 부모에게 있다. 아이가 살아가면서 겪어야할 소중할 것들을 지켜봐 주기 보다는 너무 성급하게 사회적 성공과 부모의 가치관을 아이에게 강요하려고 한다. 물론 그런 삶이 아이의 사회적 성공과 행복을 보장한다면 그런 교육도 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신도 없고 또 그렇게 해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도저히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를 못하겠다. 단지 나는 하나님을 믿듯이 아이를 믿고 싶을 뿐이다. 저 들의 나무들이 저리 잘 자라듯이 믿고 바라고 기도해주고 격려하는 가운데 아이는 분명 자신의 삶과 믿음을 찾아서 굳건하게 잘 자라 줄 것이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어찌보면 아이는 내게 주신 또 하나의 기회인 듯 하다. 사람에게 희망을 걸지 않게된 염세주의 비스무레한 종교인이 되어버린 내게, 하나님은 다시 한번 사람에게 희망을 걸고 살라는 그런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기대하지 않고 기도하며 바라는 사랑이라면, 아이에게 대하듯 그런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대한다면, 분명 아이가 변해가듯 다른 이들도 조금은 더 빛나는 모습들로 성숙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꿔본다. 왜 사람은 믿는만큼 사랑받는만큼 변해간다고 말하지 않는가.

집으로 들어오니 손에 낀 털장갑에 눈이 많이 묻어있다. 장갑을 벗어서 벽에 툭툭쳐 눈을 털어내니 뒤에서 똑같은 모양새로 장갑을 벗어 벽을 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내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스타트랙 다크니스를 보고있자니 아이가 들어와 앞에 앉아 같이 영화를 본다. 작년만 해도 재미없다고 안보더니 재미있어하면서 본다. 그리곤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함께 본다. 물론 한참 영화를 보던 중에 엄마에게 걸려 같이 혼나고 영화를 끄고 아이를 잠자리에 재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이는 웃으며 잠이 들었다.

완벽하지도 온전하지도 않았지만 꽤 만족스런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2014년의 12월이 저물어가면서 이제 아홉살 아이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 하루가 소중하고 아름다운 날들이다. 이 시간들을 아이가 충만히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덩달아 그런 아이를 통해 나또한 이 시간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체험하길 원한다. 분명 아홉살의 아이가 살아가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또한 나의 시간이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한다. 이 시간이 내게 감사와 위로가 되었듯이 언젠가 아이의 저 먼 미래의 시간에도 같은 감사와 위로가 함께 하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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